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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바리톤 김범진 성신여자대학교 성악과 교수
인터뷰 - 바리톤 김범진 성신여자대학교 성악과 교수
  • 유준호 기자
  • 승인 2017.12.18 0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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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잘하려면 인성과 인격이 좋아야 한다.”
김범진 교수

 

김범진 성신여대 성악과 교수는 끊임없는 스스로의 길을 지금까지 걸어왔다.

현재 성신여자대학교에서 평생교육원의 원장까지 역임하며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는 그는, 원래부터 성악을 지망하던 성악도가 아니었고, 그의 모교인 연세대학교 성악과를 지망하던 시기에도, 성악은 전문적으로 지도받지 못한 채였다. 연세대학교 입학 후, 성악을 본격적으로 수학하던 시기에도 그는 좀처럼 “제도권의 주류”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지만, 그러한 그의 성향이, 어쩌면 그의 자유로운 기질을 표출하던 한 가지의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세대 재학 시절부터의 그는,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서 주역인 피가로 역할을 맡아 열연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린 뒤, 이후 이태리 유학길에 올라 현지 음악교육의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산타체칠리아 국립음악원과 오시모 아카데미아, 그리고 롯시니 국립음악원을 거치며 자신만의 목소리와 음악세계를 구축해 갔고, 그 뒤의 이태리 현지와 국내외적인 성악 연주를 통해 스스로의 음악세계를 만들게 되었다.

약 8년 동안의 이태리 유학과 그 후로 이어진 유럽에서의 성악연주자 생활을 통하여, 그는, 이태리 페사로시의 롯시니 국제음악제와 롯시니 음악원 솔리스트로서의 유럽 순회 연주를 필두로 활발한 연주활동을 펼쳤으며, 이태리 국영방송인 "RAI"와 바티칸 방송 등에도 출연하여 인지도를 넓히게 된다. 한국으로의 귀국 후에는 국립오페라단과 서울시립오페라단, 김자경오페라단 등의 국내 최고의 오페라단에서 오페라 ‘리골렛토’, ‘토스카’, ‘카르멘’, ‘사랑의 묘약’, ‘세빌리아의 이발사’, ‘마술피리’ 등과 ‘춘향전’, 시집가는 날‘, ’에밀레 종‘ 등의 창작 오페라 등에 등에 주역으로 출연하며 강하고 폭 넓은 카리스마의 음색을 가진 성악가로 명성을 날렸다. 이후로도 국내의 연주는 물론, 이태리와 독일, 미국과 홍콩, 일본,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 등지로 순회 연주를 왕성하게 펼치는 한편, 성신여대 성악과 교수로 후학들의 양성에 힘을 쏟고 있는 중이다.

단정하면서도 멋진 헤어스타일을 통하여 예술가의 멋스러움을 보여주며, 예리한 눈매를 에워싼 눈가의 부드러운 잔주름을 통하여 대화하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을 또한 보여주던 그를, 성신여대 음악관으로 찾아 가 만나 보았다.

 

▶ 지난 봄과 가을, 올 해 두 차례의 독창회를 가졌다. 해 마다 같은 시기에 그러한 독창회를 갖는가.

(김범진 교수) 성악과 교수로서 독창회는 다른 전공의 교수들이나 학자들이 갖는 논문발표회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 자신의 학문적 활동을 표현하고 보고하는 것이기에 항상 정기적인 독창회를 가지려 하고 있다.

▶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달라. 성악으로의 진로는 언제 어떤 경위로 결정하였는가.

(김범진 교수) 처음부터 성악으로의 진로를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원래는 지휘를 전공하여 훌륭한 지휘자가 되고 싶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클래식 음악의 환경에 쌓인 채 성장하였다. 당시 고향이었던 전북 정읍의 집에는 나의 키 보다 훨씬 크던 ‘그랜드피아노’와 ‘전축’이라고 일컫던 오디오시스템이 있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대학교육을 받으신 선친(1922년 생, 작고)과 모친(1925년 생, 작고)께서는 항상 집 안에 클래식 음악이 나오도록 하셨고, 클래식 음악은 나에게 있어서 성장시절의 자연스러운 환경적 요소였다. 그 후로 초등학교 시절 가업이 기울어져 서울로 이주한 다음에는 아홉 식구가 방 두 칸에서 지내야만 하는 상황이 성인으로 상장할 때까지 계속되었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환경에서 우러러 나온 음악을 사랑하는 내 마음까지 변한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시절 대학에 진학하여 지휘를 전공하고자 했고, 숭문고등학교 재학 시절의 1학년 때부터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하며 교회의 성가대 지휘자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어느 대학 교수님을 통하여 지휘는 클래식 음악의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하고 난 후의 최종점에 위치한 분야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성악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당시의 가정형편으로 레슨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교회에 다니던 성악 지망의 친구가 레슨을 받는 모습을 창문 밖에서 한 번 본 것이 전부였다. 여하튼 그래도 연세대학교 성악과로 진학은 하게 되었고, 나의 본격적인 성악 공부는 대학 진학 이후에 시작되었다.

대학 졸업 후, 결혼을 일찍 하였는데, 당시 ‘김자경오페라단’에서 단역을 맡아 볼 때 오페라단의 주역으로 촉망받던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지금 추계예술대학교에서 또한 성악과 교수로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는 진규옥 교수이다. 결혼 후 아이를 낳은 상태에서 먼저 이태리로 유학을 갔고, 후에 가족들과 현지에서 합류하였다. 그리고 7년 8개월에걸친 유학과 현지에서의 활동을 한 후 귀국하였다.

▶ 성악과 클래식 음악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요즘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가 관심사이다.

(김범진 교수) 우리가 클래식 음악이라고 흔히 부르는 장르는 서양에서 시작된 문화이고, 그 배경에는 기독교로 부터의 종교음악과 유럽 왕실의 궁중음악으로부터 비롯됐다. 사실 클래식 음악은 대중화가 되기 어려운 문화의 장르이다. 같은 노래를 비교해 봐도 대중음악 속의 노래에는 시대적으로 요구되는 장르가 빠르게 바뀌며 돌아가는 대신에 클래식 음악 속의 노래는 그 연원의 뿌리가 깊다. 그래서 대중음악의 노래는 흔히 ‘유행가’라고 부른다. 어떤 시기에서 인기가 올라가지만, 그 장르의 유행이 지나면 옛날 노래가 되고 잊혀 지기도 한다. 반면에 클래식 음악 속의 노래는 수 백 년간을 이어 오며 명곡들은 끝까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서로의 문화적 장르가 다른 것이다.

▶ 어떻게 하면 훌륭한 성악가가 될 수 있는가. 후학들에게 어떤 지도를 하고 싶은가.

(김범진 교수) 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가장 먼저 강조하고 잇는 것은 “노래를 잘하려면 목소리가 아닌 인성과 인격이 좋아야 한다”라는 것이다. 훌륭한 성악가의 3대 요소로, 첫째는 인성과 인격의 함양, 둘째로 최선을 다 하는 꾸준한 연습, 그리고 세 번째로는 선천적으로 갖춘 타고난 목소리를 들 수 있겠는데, 사실 타고난 목소리는 그렇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우리가 세계적인 성악가 ‘카루소(엔리코 카루소, 1873~1921)’의 예에서 보듯이, 그는 어릴 때부터 정식으로 클래식 음악을 배운 성악가가 아니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공장에서 직공 생활을 하며 노래를 즐겼을 뿐이었고, 악보조차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성악가가 되기로 결심한 후 엄청난 노력으로 세계적인 대가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다. 최선의 노력은 목소리마저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인터뷰에 감사하다.

(김범진 교수)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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