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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테너 임웅균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인터뷰 - 테너 임웅균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 한국스포츠통신
  • 승인 2017.12.23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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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성악가는 사회를 논할 줄 알아야 한다.
임웅균 교수

- 노래의 리듬과 두뇌의 흐름은 일치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음악원에서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는 성악가 테너 임웅균 교수를 만나러 갔던 날은, 그가 한국경제문화원에서 주관하는 ‘2017 한국경제문화대상’의 시상식에서 문화부분 수상을 받는 날이었다.

 

서울 서초동 우면산 밑으로 자리 잡은 국립 예술의 전당 내에 위치한 한예종 음악원으로 임웅균 교수를 찾아가며 일말의 기대감이 든 것은, 평소 방송을 비롯한 각종 언론매체에 적극 출현하여 자신의 소신과 의견을 밝히고 매진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던 그의 성향과 다방면에서 볼 수 있었던 그의 전문가적인 식견 때문이었다. 그의 전공인 성악과 음악은 물론이고, 한 때 서울시장까지 출마했었던 그의 다채로운 경력과, 우리나라 청소년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으며, 우리나라 문화 전반에 관한 그의 적극적인 사회적 활동은, 기자로서의 인터뷰 대상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과 함께, 이야기 거리가 틀림없이 많이 나올 것이라는 예상이 들었고, 직접 만나 장시간에 걸친 인터뷰에서 마주했던 임웅균 교수는, 그 예상조차 뛰어 넘는 해박한 지식과, 본인의 세계관을 피력해 주었다.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에 관한 해박한 전사(戰史)를 바탕으로, 태평양 전쟁을 발발한 일본이 왜 아직까지 식민지였던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쟁 피해의 당사국들과 위안부를 비롯한 당사자들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하지 않고 재무장의 기회만 엿보고 있는지부터 시작하여,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와 그에 얽힌 독립운동가 인물들,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에 대한 이야기, 플라톤의 “이덕론”에 따른 철학적인 교육의 고찰과 함께 한류와 우리나라 문화발전에 관한 그의 거시적인 담론, 그리고 피아노의 조율 방법, 심지어는 성명학과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의 종교관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격정적으로, 성악의 한 구절을 직접 들려주기까지 하며 이어졌던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기자는 한 사람의 “대가”에게 개인 교습의 형식을 빌려 훌륭한 강의 한 편을 들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학생회장을 역임했던 서울 명지고등학교 재학 당시에는, 군인이 되고자 하는 꿈을 키웠으나 연세대학교 성악과를 수석으로 진학하여 수학한 후, 이태리로 건너 가 산타체칠리아 국립음악원과 오시모 음악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며 학위를 획득하였고, 귀국 후 자신의 전공인 성악과 음악은 물론, 각종 사회활동에 투신하여 청소년 폭력 예방과 독도 지킴이 활동까지, 우리나라 문화의 발전에 앞서서 매진하고 있는 그를, 다음과 같이 인터뷰 하였다.

 

▶ 솔직한 느낌으로, 첫 인상이 성악가 같지 않다.

 

(임웅균 교수) 원래의 내 꿈은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과거 일제의 식민지 시절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구마모토 공업대학을 나오신 아버님이 군인이셨다. 5개 국어에 능통하셨던 분인데, 아버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금도 내 말투와 행동양식이 군인의 그것과 흡사한 것이 많을 것이다. 서울 명지고등학교에서 학생회장을 하며 군인이 되고자하는 꿈을 키웠는데, 당시 지금도 너무나 사랑하고 있는 어머님께서 반대가 심하셨다. 어머님은 신의주의 압록강 부근에서 목재업을 하던 대지주의 딸로 태어나신 실향민이셨는데, 자기주장이 강하고 일종의 야합을 못하는 나의 성향이, 직업으로써의 군인이 되기에는 적합하지 못하다는 이유에서 군에 대한 진로의 반대가 심하였다. 결국 고등학교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성악으로 진로를 바꿨는데, 5개월 정도 연습하고 연세대학교 성악과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은 이제 예술을 전공하고자 하는 모든 학생들이 가장 입학을 희망하는 교육기관으로 명실상부하다. 한예종의 특색은 무엇인가.

 

(임웅균 교수) 우리는 예술분야에서 학자를 양성하는 곳이 아니고, 필드에서의 플레이어(Player)를 길러내는 곳이다. 그것이 일반 대학과 확연히 구분되는 우리의 지향 목표이다. 이태리와 독일, 프랑스 등, 예술과 문화가 융성하고 발전한 나라들에는 일반 대학에서 음악과 미술, 그리고 무용 등의 예술분야 전공학과가 거의 없다. 별도의 전문 교육기관들이 존재하여 인재들을 양성하고 있는 것이다.

 

▶ 그렇다면 제자들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교육을 하는가. 성악의 스킬이 아닌, 다른 지향점을 제시하고 있는가.

 

(임웅균 교수) 예술가가 갖추어야 할 ‘균형성’이다. 중세 시대 유럽의 교육은 귀족들과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개인 교수를 초빙해서 이루어지는 형태를 근대까지 이어왔고, 예술과 체육은 모든 교육에서 필수적인 두 가지의 분야였다. 그리고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이덕론(二德論)”에 근거한다. 예술을 익히면 정서적인 인격의 함양과 사물을 바라보는 심미안을 갖출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반대급부로 성격과 성향이 극도로 예민해질 수 있다. 이것을 보완하여 균형을 맞추어 지는 것이 체육이다. 체육활동을 통하여 용감하고 진취적인 성향을 키울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체육도 지나치면 폭력과 호전성을 동반하게 되고 이것을 또한 보완하여 주는 것이 예술교육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를 보면, 아주 대조적인 개념의 두 나라가 존재한다. 바로 아테네와 스파르타이다. 아테네는 문화와 예술이 융성했던 나라이고 스파르타는 군사적인 강국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리스를 통일한 국가는 “테베”라는 나라였다. 테베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특징이었던 문화예술과 군사적인 두 분야를 두루 갖추고 있던 곳이었다.

 

이렇게 두 가지의 분야가 상호 보완을 이루며 하나의 인격체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나는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 전공인 성악은 물론, 내가 섭렵했던 역사와 사회, 그리고 인문학을 많이 전수시키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이 위축되거나 사양화 된다면, 상업적이고 호전적인 인간의 욕망이 살아나서 우리 사회는 도덕성을 잃게 될 것이다.

진짜 성악가는 사회를 논할 줄 알아야 한다.

 

▶ 구체적인 커리큘럼이나 강의 내용을 설명하자면 어떤 것들인가.

 

(임웅균 교수) 우리나라에는 현재 약 180개 대학에 성악과가 존재한다. 그런데 그 많은 대학교의 성악과 중에 우리나라 고유의 한국가곡을 학생들이 이수해야 할 필수과목으로 선정한 곳은 한예종이 유일하다. 나는 한국가곡을 특선한 책자까지 완성하여 제자들에게 익히도록 하고 있다. 이는 점점 국적성이 모호해지는 예술계의 성향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예술가들에게는 분명히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목적의 지향점이 존재하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예술활동을 통하여 국가와 사회의 구성원들에게도 위안을 주며 공감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일제의 식민지 시절에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활동했던 많은 독립운동가들 중에도 음악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또한 다수 존재한다. 그들은 음악을 비롯한 자신의 전공을 통하여 우리나라를 독립시키고자 일제에 대항하여 싸웠다.

 

▶ 대중문화예술 분야를 비롯하여, 지금 우리나라 문화예술 분야의 성향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임웅균 교수) 일단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의 여건과 국가로부터의 지원을 먼저 이야기 하자. 믿을 수 없게도 우리나라에는 아직 50인 이상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고 녹음해야 할 시설이 갖춰진 스튜디오가 전무하다. 따라서 그러한 레코딩 작업에 필요한 기술 전문가도 없는 형편이다. 내 목표 중의 하나가 그러한 장치와 시설, 그리고 면적을 갖춘 스튜디오를 만드는 것이다. 서울과 수도권 지역의 아파트형 공장 같은 곳을 확보하여 그렇게 만들고 싶다.

 

우리나라의 문화와 예술은 근 십년 이래 “한류”라는 특징을 띄고 국제화와 세계화가 이루어졌다. 그 이면에는 대중예술 분야의 공헌이 절대적이었다. 문화예술의 발상을 ‘목욕탕’의 예로 설명하자면, 목욕탕 안에서 여러 가지의 예술 활동들이 창작될 수 있다. 느긋하게 목욕을 즐기다 보면 그 과정에서 멜로디의 작곡과 가사가 되는 시의 발현, 그리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춤까지 출 수 있게 된다. 그런 것들이 인간에게 내재된 원초적인 감성적 본능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 면에서 ‘강남스타일’을 부른 가수 ‘싸이’의 세계화가 설명된다.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멜로디와 박자를 갖춘 노래에 춤까지 멋들어지게 곁들여졌다. ‘강남스타일’이 반복되는 가사 또한 외국인이 따라 부를 수 있게 간단하다. 멋진 일 아닌가.

 

그리고 한류가 오랫동안 지속되려면, 가사와 그 내용이 많이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내부적인 면에서 보자면, “트롯트”라는 장르가 다시 살아야 한다. 자생할 수 없는 여건이라면 정부라도 나서서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 원래 트롯트는 일반 서민들이 삶에 지쳐서 위안 받고자 했을 때 내쉬는 한숨을 그대로 박자로 한 대중가요의 장르였다. 삶의 애환을 노래 한 곡으로 풀어버렸던 것인데, 이제 젊은이들 위주의 빠르고 비트가 강한 음악 장르가 주류를 이루면서 중장년 층이 그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받고 싶어 하는 곳이 음악에서조차 멀어졌다. 나는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급격히 높아진 것에 대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트롯트가 사양화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트롯트 이전 우리나라 서민들은 민요를 즐겨 불렀었다. 민요와 트롯트 모두 서민들이 그들의 한숨을 내뱉을 수 있는 음악의 장르였다.

 

그런 면에서 음악은 인간 본연의 심성이 그대로 투영된 예술분야이다. 우리가 피아노를 조율할 때 왜 “라”의 음절로 기준을 잡는지 아는가. 사람이 태어나서 아기일 때 가장 먼저 입을 열어 말하는 음절이 바로 “라”의 음절이다. “엄마” 혹은 “마~”라고 부르는 그 음절이다. 그것부터 인생의 알파(Alpha)가 시작되고, 성격의 말씀과 같이 오메가(Omega)로 끝이 난다. 매우 심오한 이치 속에서 음악이 발현된 것이다.

 

▶ 성악과 음악 이외에도 우리나라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청소년 폭력방지와 독도 지킴이 같은 사회봉사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임웅균 교수) 나 역시 성악을 수학하고 이태리로 유학가 있던 시절에 경제적인 문제를 비롯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 시절 나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주셨던 분이 명지대학교 설립자인신 유상근 선생님이시다. 그 시절 그 분으로부터 생명선과 같은 절대적인 지원을 받으며 결심했던 것이 지금 청소년과 폭력문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고아를 비롯한 불우한 아이들을 돕고, 그들이 당면한 여러 문제들의 해결을 위하여 일하겠다는 것이 당시 내가 결심했던 바이고 지금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독도지킴이 활동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세계 2차 대전 종전 후, 전범 국가들인 독일과 일본의 피해국 당사자들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 독일은 패전 후 오랜 시간에 걸쳐 셀 수 없을 만큼의 피해국 당사자들에 대한 셀 수 없을 만큼의 사과와 그에 따른 보상을 해왔고, 지금도 해오고 있다. 아직도 관련된 전범들을 색출하고 세상 끝까지 쫒아가서 체포해 재판한다. 그런데 일본은 왜 그에 상응하는 사과와 조치를 진심으로 하지 않을까.

 

1차 세계 대전 때, 패전국이었던 독일은 사실 상대국들에게 자신들의 본토를 점령당하지는 않았었다. 서부 유럽에 형성된 전선에서의 장기적인 소모전 끝에 항복하여 베르사이유조약을 맺고 엄청난 보상을 승전국들에게 해주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보상을 불평등이라 하여 다시 재무장하고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그런데 2차 대전의 과정과 결과는 앞의 1차 대전의 그것과 너무도 달랐다. 자신들의 국토는 완전히 결단이 났고, 점령군대인 소련과 미국, 영국군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점령하고 엄청난 고통을 맛보게 하였다. 그 결과로 독일인들은 느낀 것이다. 자신들의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그러나 일본은 상황이 다르다. 당시 일본과 상대했던 미국과 미군은, 일본의 본토에 군사적인 침공으로써의 무력상황을 만들지 않았었다. 엄청난 수와 양의 공군력에 의한 본토 폭격이 비록 있었지만, 육상 병력의 전투 상황은 일본 본토에서는 없었다. 원폭 두 번을 하고난 뒤 무조건 항복했던 일본에 평화롭게 상륙하여 그들을 통치했을 뿐이었지, 독일의 예처럼, 점령군에 의한 전투행위의 연장에서의 학살과 비인간적인 행위들은 당해보지를 못했었다. 당해봐야 어려움을 아는 것인데, 일본은 그들이 전쟁을 일으키고 식민통치했던 피해국 당사자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진정으로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 날에도 일본이 주변 피해 국가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후안무치의 이유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배후중상설” 혹은 “비수설”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일본에 대한 분노가, 나를 독도 지킴이 같은 활동에도 적극 참여시키고 있다.

 

▶ 성악을 전공으로 희망하거나, 지금 전공 과정 중인 제자, 그리고 학생들에게 무엇을 조언해주고 싶은가.

 

(임웅균 교수) 나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나의 명함에 새긴 성경의 문구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명함에는 신약 이사야 43장 21절의 문구 -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 가 실려있다) 신을 모르는 사람은 좋은 음악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자가 최고의 음악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장시간 대가로부터 여러 교훈이 되는 강의를 들은 기분이었다. 인터뷰에 감사하다.

 

(임웅균 교수) 그러한가. (웃음) 나 역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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