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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발레리노 박재근 상명대학교 무용과 교수
인터뷰 - 발레리노 박재근 상명대학교 무용과 교수
  • 유준호 기자
  • 승인 2017.12.25 12: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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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 우리나라 남자 발레를 대표하던 발레리노 1세대

- 일반인들에게 친숙할 수 있는 장르의 소규모 공연을 기획

- 진로를 적성과 희망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상명대 무용과의 교육 시스템 구축

 

박재근 상명대학교 무용과 교수

박재근 상명대학교 무용과 교수는 우리나라 남자 발레를 개척해 왔던 빌레리노 1세대였다. 그 자신이 걸출하게 뛰어났던 기량을 자랑하던 발레 무용가였을 뿐만 아니라, 현역에서의 은퇴한 이후에는, 다양한 발레의 스킬과 예술성을 제자들에게 전수해주는 스승으로서의 역할 뿐만이 아니고, 안무를 비롯한 발레공연의 종합 기획자로서, 그리고 국내외의 여러 세계적인 발레콩클 등에서 심사위원으로 활약하며, 우리나라 발레 무용수들과 발레 자체의 수준을 세계적으로 높이는 것에 결정적인 기여를 해왔다.

 

더구나 놀라운 사실은, 그의 아홉 살 터울 아래인 남동생까지, 형제가 발레리노로 활약했었다는 사실이고, 현재 한성대학교 무용과 교수로 재직 중인 박재홍 교수를 비롯하여 그 밑의 막내 남동생까지 모두 삼형제가 대학교수로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남 광주의 한 대학교에서 원예학과 교수로 평생 재직했던 그의 부친 박화성 교수는, 지난 12월 7일 한국발레협회가 주관했던 “한국발레협회상”의 시상식에서 자랑스러운 어버이 상을 수상하였다.

 

대학가의 기말고사와 이어지는 종강이 겹치고 있던 즈음에, 서울 종로구 홍지동에 위치한 상명대학교 아트홀로 박재근 교수를 찾아 가 인터뷰 하였다. 그의 개성을 표현하는 듯, 멋들어진 턱수염과 서글서글한 눈매를 보여주던 박재근 교수는, 발레리노라 하기 보다는 스포츠맨과 같은 당당한 체격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인터뷰의 과정에서, 학창 시절의 그가, 복싱과 격투기, 그리고 싸이클 등의 운동 종목에서 전문선수로 활약했던 이력의 소유자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제자들과 함께 한 박재근 교수

 

▶ 우리나라 남자 발레의 1세대 개척자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력과 경력을 소개해 달라.

 

(박재근 교수) 나는 전남 광주에서 중학교 때까지는 여러 종목의 운동선수를 하며 자랐다. 레슬링과 태권도, 합기도와 격투기, 그리고 싸이클 종목에서의 선수였다. 특히 싸이클은 연령대의 대표선수로 선발되었을 정도였다. 지금도 나의 신체 중 허벅지의 굵기와 힘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웃음) 그리고 그러한 스포츠를 통한 신체적 힘과 기능이 나로 하여금 발레의 전공을 가능케 하였다.

 

그러나 그 시절 그러했던 스포츠 종목에서의 선수활동이 원인이 되어 고등학교 진학은 또래보다 3년 늦게 하게 되었다. 선화예술고등학교 1기로 입학하여 수학하였는데, 진학 당시의 원래 전공은 성악이었다. 노래를 부르며 선화예고를 들어갔는데, 고 1때 발레공연을 보고 전공을 바꾸었다. 그 후 세종대학교 무용과에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학부 졸업 후 한양대학교 대학원으로 진학하여 석사과정을 마치고, 당시 국교 수립 이전에 러시아로 건너가 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서 박사를 취득하였다. 이후에 러시아 현지에서 알마타 국립발레학교의 전문교사로 현지 학생들을 가르치며 안무가로도 일을 하였고,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러시아 국립발레단의 교사와 모스크바 무용예술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996년 한국으로 돌아와 20년이 넘게 상명대학교 무용과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 발레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러시아에서 발레 무용수로 인정받는 것과 선화예고 재학 당시 발레로 전과했던 것은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 넘는 일이다. 어려움이 없었는가.

 

(박재근 교수) 어려움이 왜 없었겠는가. 사실 처음 시작할 때는 만만한 생각도 있었다. 그때까지 운동선수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시작을 해보니 너무나 어려운 과정들의 연속이었다. 거의 죽을 지경까지 여러 차례 갔었던 과정이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발레가 어려운 장르가 아니었다면 도중에 그만두었을지도 모른다. 나 자신을 계속 독려하며 이제까지 오게 된 것에는 그렇게 어려운 발레의 길에 계속 도전하고 싶은 투지가 아울러서 동반됐었다. 이렇게 어려운 길이라면, 남자로서 한번 도전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끊임없이 생각했었다.

 

사실 주위의 편견이랄까 고정관념 때문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발레는 열 살을 전후해서 조기교육으로 시작해야 하는 예술이다. 그런데 나는 선화예고에 입학 한 후 발레공연을 보게 되었고, 그러한 발레에 흥미를 느끼는 한편으로 저 정도면 나도 충분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당시 담임선생님이 성악을 가르치신 분이었는데, 네가 춤을 배워 무엇을 하겠냐는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기어코 발레로 전과하였다. 그 당시 남자가 무용을 하면 그 장래를 비관적으로만 보는 분위기가 팽배했었다. 그분에게 계속 꾸지람을 받고, 때로는 맞기도 하고, 나 자신이 선생님께 대들기도 하면서 결국 발레를 시작하였다.

 

러시아로 유학을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현지의 무용수들과 교사들이 의혹의 눈초리로 나를 처음 대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실력을 보고 인정해주었다. 선화예고 재학 당시 나에게 발레를 가르쳐주셨던 분은 ‘애드리언 댈러스’라는 미국 출신의 발레리나였는데, 그 분에게서 발레의 많은 것을 배웠다.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남자 무용수들이 필요로 하는 의상과 장비를 구할 수 없어 미국 현지에서 그분을 통하여 조달받고는 하였다. 그분은 우리나라 발레의 초석을 이루셨던 분이었다.

 

▶ 1980년대를 관통하면서는 우리나라 최고의 발레리노로서 현역 생활을 하였고, 1990년대에 들어서는 러시아 유학을 떠나며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박재근 교수) 지금이야 몸 관리에 따라서는 불혹의 나이를 넘겨서도 현역생활을 하는 무용수들이 있지만, 그때만 해도 서른 살이 되면 은퇴를 하는 시기였다. 당시 민간오페라단으로 최초 설립되었던 “유니버설발레단(UBC)"의 창단 멤버로 수석 무용수를 하였는데, 공연 중에 부상을 당하였다. 그 이후로 지도자의 생활을 계획하였고, 러시아 유학은 그러한 계획을 실행한 것이었다. 당시 유니버설발레단의 발레리나 수석 무용수가 지금 단장인 문훈숙 단장이었고, 우리나라 발레리나로서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선화예고 출신들이 대거 참여한 유니버설발레단 출신의 무용수들이 오늘 날 우리나라 발레계의 중추적인 역할들을 하고 있다. 문훈숙 다음으로 나온 독보적인 발레리나가 바로 강수진이다. 강수진은 선화예고 6기 출신의 발레리나였고, 내가 대학 재학 시절 중학생이었다. 문훈숙과 강수진으로 이어졌던 계보가 선화예고가 배출한 프랜차이즈 스타랄까, 우리나라 발레리나들의 계보였다.

 

▶ 러시아는 발레의 종주국이다. 그곳에서의 발레 무용수들을 교육하고 배출하는 시스템은 어떠한가. 우리나라와 비교하여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박재근 교수)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러시아만이 시스템화 되어 있는 교육체계를 가지고 있다. 발레는 열 살 이전에는 음악, 체육, 미술 등의 종합적인 공부를 익히고 열 살 이후에는 전문화 과정으로 들어가야 한다. 러시아의 전문 발레학교는 전문화 과정으로 들어가는 열 살 이후의 무용수부터 열여덟 살까지의 학생들에게 전문적인 발레의 과정을 가르친다.

 

우리나라는 대학교에 무용과가 제일 많이 존재하는 나라이다. 세계적으로 이런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열여덟 살 때까지 발레를 교육받고, 그 이후의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 전문 무용수로 갈 것인지, 아니면 그 때 대학으로 진학하여 학문적으로 무용을 공부하고 연구해야 할지를 말이다. 그 때 무용과 관련된 자기 직업으로서의 진로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 무용수는 무용단으로 가고, 교사가 되고 싶으면 대학교로 진학하여 관련 공부와 자격을 취득해야 하고, 더욱 연구를 하고 싶으면 대학원이나 유학을 선택해야 하는데, 현재와 같은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으로는 그러한 진로 선택의 기회가 없다. 발레와 무용을 하는 학생들이 전부 대학에 진학하고, 한 해에 무용전공 학생들이 이천명 정도 대학을 졸업하여 배출되는데, 이들이 직업적으로 선택할 길이 아주 좁고 대안이 없는 실정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세계적으로 발레 수준이 가장 높은 5대 강국 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의 발레 무용수들 수준은 세계적이다. 그리고 우리 상명대학교 발레 무용수들의 실력도 최상급이다. 상명대학교 무용과 학생들처럼 공연을 많이 소화해내는 학생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학생들이 대학 졸업 후 사회에 진출하면서부터는 진로의 선택에서 막혀버리는 것이 현재 우리나라의 실정이다.

 

▶ 현직에서 22년차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대학의 교수로서, 발레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문화예술 분야의 전개와 그 대중성 확대, 그리고 지원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견해를 밝혀 달라.

 

(박재근 교수) 지금 우리나라는 발레를 비롯한 문화예술을 대규모의 고비용이 소요되는 공연으로만 해석하는 경향이 절대적이다. 우리나라는 문화예술에 관련된 정부 지출의 예산 규모가 세계적인 수준인 나라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규모와 필요로 하는 예산의 그것과는 괴리감이 엄청나게 존재한다. 대규모의 무대에서 수십억의 비용을 들여서 공연하는 것만이 고급 문화예술을 표현하거나 접하는 방법은 아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지방자치제도가 많이 발전되었고, 지방에는 군 단위에 까지 예술을 공연할 수 있는 극장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런 곳들이 일 년 동안 공연으로 그 일정이 다 채워지지는 않는다. 텅텅 빈 채로 존재하는 것이다. 요구되는 비용만 최소 억 단위가 넘는 이유에서이다. 나는 이러한 사실들이 정말 납득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연말이 가까워지면, 확보된 예산을 소진하기 위해 갑작스러운 공연 요청들이 쇄도하고 있다. 예산을 소진하여 차기 연도에도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문화예술의 공연이라는 것이 발레단 공연이나 오페라 공연처럼 거창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시골의 읍면 단위로 가서 그곳의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대중가요와 민속공연을 들려드리고 보여드리는 것들이 더 실질적인 문화공연일 수도 있다. 마을 마다 존재하는 회관이나 체육복합 공간들을 활용하여 이런 소규모적이고 대중적인 공연을 저비용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오히려 그러한 형태의 공연을 좋아한다. 같이 즐길 수 있어야 예술 아닌가.

 

▶ 발레리노와 안무가로서 뿐만 아니라 공연 기획자와 예술 감독, 그리고 대학 교수로서 여러 가지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현재 제자들을 어떠한 목표로 가르치고 있는지, 현장과 이론을 어떻게 접목시키는가.

 

(박재근 교수) 러시아와 미국, 프랑스 등 발레를 비롯한 문화와 예술의 선진국들 예를 보면, 우리나라와 같이 대학 때까지 발레만 끊임없이 공부하고 사회에 진출하는 예는 없다. 만 18세까지는 모두 발레를 배우고 그 이후에는 진로를 적성과 실력대로 나누어 자신의 진로를 선택한다. 우리 상명대학교는 학생들의 적성과 자신들의 희망 진로에 맞게 몇 가지 분야로 나누어 교육을 하는 프로그램을 이미 완성하였고, “CDR-1/2/3/4"라고 칭한다.

 

CDR-1은 전문 무용수를 양성하는 것이고, CDR-2는 예술교육을 전공하는 것이다. 무용뿐만 아니고 음악과 체육, 미술 등 관련된 기능과 예술성을 공부하여 교사나 지도자가 되는 코스를 말한다. CDR-3는 예술 의과학 분야이다. 전문적인 피지컬의 개념으로 신체의 기능 향상을 공부하여 자라나는 청소년들과 실버연령층의 노인들에게 다양한 체력 증진의 효과를 줄 수 있는 분야를 전공케 하는 것이다. CDR-4는 무용 산업 분야를 공부하여 발레와 무용의 공연과 교육을 어떻게 산업화로 접목할 수 있을지를 공부케 한다. 상명대학교 무용과는 이러한 시스템을 구축하려 하고 있다.

 

▶ 인터뷰에 감사하다.

 

(박재근 교수)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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