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안태근 한국외국어대학교 미디어학과 교수 (전 EBS 프로듀서)
인터뷰 - 안태근 한국외국어대학교 미디어학과 교수 (전 EBS 프로듀서)
  • 유준호 기자
  • 승인 2017.12.28 16: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 영상 다큐멘터리 개척자 역할을 해 온 영화감독
한국역사 100년사 포스터

우리나라 영상물 다규멘터리를 개척해 온 안태근 교수(전 EBS PD)는 그의 다채로운 경력에 걸맞게 여러 가지 직함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른 다양한 문화 행사를 개최하여 왔다.

 

1955년 생으로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시절 접했던 한국 영화를 통하여 장래의 희망으로 영화감독을 꿈꾸며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로 진학하여 수학하였고, 대학 졸업 후,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행정언론대학원에서 신문방송학으로 석사학위를, 그리고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에서 글로벌문화콘텐츠학으로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였다.

 

1981년 영화계에 입문한 후, 정진우와 임권택 감독의 조감독으로 활동하였고, 1986년 다큐멘터리 ‘살풀이춤’을 제작, 연출하면서 우리나라 영상물 다큐멘터리 분야로 진출하였다. 같은 해에 극영화 시나리오 ‘사방지’를 집필하였고, 1991년 영화 ‘대한국인 안중근’을 제작, 연출하였다. 같은 해 교육방송 EBS에 프로듀서로 입사하면서부터 우리나라 영상물 다큐멘터리 분야로 활발하게 진출하여 ‘전통문화를 찾아서’, ‘다큐 이사람’, ‘역사 속으로의 여행’, ‘풍수기행’등, 일련의 다큐 시리즈물들을 통하여 다큐멘터리를 개척,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갔으며, 동시에 어린이 드라마와 애니메이션까지 연출하였다.

 

2004년 광복절 특집 3부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 2007년 한중수교 15주년 특집 5부작 ‘청사초롱과 홍등’을 제작하였고, ‘거장 신상옥 영화를 말하다’, ‘한국액션영화 개척자 정창화 감독’, ‘시네마 천국’등의 영화 프로그램들도 제작하였다.

 

그동안 한국청소년영화제 우수작품상, 한국단편영화제 금상 및 우수작품상, 금관상영화제 감독상 및 우수작품상, EBS 우수프로그램상 최우수작품상과 이달의 PD상 등 다수의 수상 영예를 안았고, 1994년에는 서울정도 600주년을 맞아 자랑스러운 서울시민상, 2001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책과학대학원 최우수논문상도 수상하였다.

 

그동안 수십편의 영화 시나리오를 집필하였고, 청주대학교 공연영상학부 겸임교수를 역임하였으며,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의 이사와 한국외국어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10년에는 ‘브루스리데이’를 개최하여 ‘한국이소룡기념사업회’를 발족하였으며, ‘이소룡영화제“ 및 관련 세미나를 연속으로 개최하였고, ’이소룡 닮은꼴 선발대회‘ 행사도 개최하였다. 저서로는 ”청사초롱과 홍등“, ”나는 다큐멘터리 PD다“, ”나는 드라마 PD다“, ”한국영화 100년사“ 등이 있다.

 

그가 집필했던 ‘한국영화 100년사“를 바탕으로, 그는 지난 2010년부터 매달 서울 상암동에 위치한 영상자료원에서, 지금까지 80회가 넘는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었고, 2017년 12월 세미나의 게스트는 과거 우리나라 영화 시나리오 대부분을 집필했던 송길한 작가였다.

 

한국영화 100년사와 관련한 동 세미나를 100회까지의 개최를 목표로 한다는 안태근 PD를 세미나 현장으로 찾아가 인터뷰 하였다.

안태근 교수

▶ 지난 2013년부터 한국영화 100년사를 바탕으로 매월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원래는 EBS에서 다큐멘터리의 영역을 개척했던 PD로 알려졌는데 영화와는 어떻게 이어졌는가.

 

(안태근 교수) EBS에서 다큐멘터리 PD로 15년을 재직했었다. 원래 나는 영화인이다. 중앙대학교에서 연극영화를 전공하고 1981년 영화계로 진출하여 정진우 감독과 임권택 감독 밑에서 조감독으로 일을 하며 10년 동안 영화계에 있었다. 그리고 1991년 교육방송국인 EBS에 입사했던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극장에서 당시 최고의 영화감독이었던 고 신상옥 감독의 영화 “꿈(Dream)"이라는 영화를 보고 영화감독의 희망을 가졌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을 영화화 했던 것인데, 당시의 나에게 영화인의 꿈을 갖게 해준 작품이다. 그 이후로 영화인이 되기 위해 한 길만을 걸어왔다.

 

▶ 한국영화사 100주년이라는 타이틀로 오랫동안 세미나를 열어왔다. 한국영화사에서 1세대 감독은 누구이며, 본인에게 영화감독의 꿈을 갖게 해준 신상옥 감독은 몇 세대 정도로 분류하는가.

 

(안태근 교수) 역시 영화 ‘아리랑’을 제작하고 감독하였던 나운규 감독이 우리나라 영화의 1세대 감독이었다. 그 이후로 세대를 구분짓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겠지만 신상옥 감독에게 영화를 가르쳐준 ‘자유부인’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던 최인규 감독이 2세대 정도 감독이고 신상옥 감독을 3세대 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신상옥 감독이 활약했던 1960년대는 우리나라 영화계의 르네상스 시대였다. 한 해 제작편 수가 250편이 넘었던 때이다.

 

▶ 신상옥 감독 작품의 어느 면에서 그렇게 매료됐던 것인가. 어떤 특징이 있었나.

 

(안태근 교수) 영화의 스토리 전개나 출연 배우들에 대한 인상보다는 그분의 촬영기법이랄까 우리가 흔히 ‘쇼트“라고 표현하는 카메라 앵글기법에 매료되었다. 그게 너무나 멋있어 보이며 영화는 저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영화에서 감독의 역할이랄까, 감독의 위대성 같은 것을 느끼며 영화감독으로의 입문을 꿈꾸었다. 고등학교 진학 시절에는 너무 그분을 존경하여 그분이 설립했던 안양예술고등학교까지 찾아간 적도 있었다. 부모님의 반대로 안양예고 입학은 무산됐지만 어쨌든 그 정도로 영화인의 길을 걷고자 노력했던 것은 사실이다. 결국 대학진학은 나의 희망대로 연극영화를 전공하게 되었다.

 

▶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영상물의 개척자로 평가 받는다. 다큐멘터리는 언제부터 시작했는가.

 

(안태근 교수) 나는 1981년 정진우 감독의 “여명의 눈동자”라는 작품 제작 떼 조연출로 합류하며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여명의 눈동자”는 TV드라마로 제작되기 훨씬 이전에 영화로 제작될 작품이었는데, 몇 가지 사유로 제작이 중단된 작품이었다. 그후로 여러 감독들 밑에서 약 5년 동안 조연출을 하며 현장에서 영화를 배웠다. 다큐멘터리는 1986년 “살풀이 춤”이라는 작품으로 감독 데뷔를 하였다.

 

▶ 영화에 종사하다가 다큐멘터리로 관심을 돌린 이유는 무엇인가.

 

(안태근 교수) 나는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서로 다른 장르로 구분하지 않는다. 두 분야 모두 영상에 의한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영화도 시나리오부터 출발하지만, 다큐멘터리도 시나리오 역할을 하는 촬영구성안부터 출발한다. 그것을 기반으로 똑같은 방식으로 제작을 하는 것이다. 영화는 허구의 스토리이고 다큐멘터리는 실질적인 스토리인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는 학창시절부터 단편영화를 제작했었고, 각종 단편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며 임권택 감독 같은 분들의 눈에 띄어 영화계로 진출하였다. 그때 제작했던 단편영화들이 주로 다큐멘터리 영화들이었을 만큼 다큐멘터리는 나에게 일상이었다. 저예산으로 가능한 장르가 다큐멘터리였다.

 

나는 또한 ‘사방지’라는 시나리오를 통하여 시나리오 작가로도 등단하였다. ‘사방지’는 조선왕조실록에도 두 줄 정도 언급된 조선 사회의 양성애자였다. 지금은 분야별로 구분이 명확하지만 원래 영화감독은 시나리오와 촬영, 편집까지 영화제작에 관한 일체의 행위 모두를 전부 할 수 있어야 했다. 예전에는 다큐멘터리와 홍보영화 등, 극영화를 제외한 모든 장르를 다 합쳐서 “문화영화”라고 칭했다. 그러한 문화영화를 제작하며 각종 수상을 많이 하였고 결국은 방송쪽 분야로 진출하였다.

 

EBS의 PD로 처음 제작한 것은 “전통문화를 찾아서”라는 다큐멘터리였다. 다큐멘터리는 총 190편 정도를 제작했는데 공중파 방송으로 제작된 최다 양을 기록 중이다.

 

▶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영상 제작의 여건과 수준, 그리고 시장성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안태근 교수) 예전과 비교해서 많이 발전하기는 했다. 다큐멘터리 제작의 태두랄까 방송용 제작의 원조는 영국의 공영방송 BBC가 처음이라 할 수 있고, 일본의 NHK도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었다. 우리도 처음에는 그들을 표본으로 접근을 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EBS가 우리나라 다큐멘터리를 선도했었다. 당시 EBS내에 타큐팀이 처음 발족됐는데 내가 초대 팀장을 역임하며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방송했었다.

 

다큐멘터리는 시간과 예산, 그리고 인력의 세 가지 요소로서 완성되어야 하는데, “전통문화를 찾아서” 같은 프로그램은 보름마다 한 편씩 방송해야 했기 때문에 사실 완성도가 떨어지는 프로그램이었다. 그에 반해서 “다큐프라임” 같은 프로그램은 일년에 두편에서 세편, 많이야 다섯편을 방송하였고, PD도 두 명이 투입됐었다. 제작비도 충분치는 않았지만 모자라는 편은 아니었고, 그러다보니 완성도가 많이 올라갔었다. 결국 “다큐프라임”은 좋은 완성도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다큐멘터리를 선도하는 입장이 되었던 것이다.

 

“원앙소리”라는 영화용 다큐멘터리 또한 화제작이 되었는데, 그것을 기점으로 영화관용 다큐멘터리가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지금 MBC의 신임 사장이 된 최승호 사장도 “자백”과 “공범자들”이라는 영화용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지 않았나. 다큐멘터리는 저예산으로도 장기간 촬영하여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장르인데 그래도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영화용 다큐멘터리 제작은 초창기라고 할 수 있다.

 

방송용 다큐멘터리는 개인적으로 이제 우리나라도 거의 BBC 수준에 근접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많이 수상하고 있다. 극장용 영화 다큐멘터리는 현재 감독도 몇 명 안되고, 시장이 더 형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건이 아직 미흡하지만, 이 분야도 곧 방송 다큐멘터리 영역처럼 빠르게 성장할 것으로 기대한다. 실력은 이제 충분히 뒷받침이 되는데,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예산의 문제이다. 방송의 외주제작은 분명히 지양되어야 할 필수 요소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다큐멘터리 제작차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체류 중이던 제작 PD 두 명이 사망하는 불상사도 결국은 제한된 예산 아래 열악한 제작 여건이 빚어낸 참사 아닌가.

 

▶ 한국 영화는 최근 들어 천만관객 영화들이 계속 나오는 등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현재 우리나라 극영화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안태근 교수) 천만관객 영화가 일 년에 몇 편이나 상영되는가. 한두 편에 지나지 않는다. 대개의 영화들은 흥행에 실패하고 있을 뿐이다. 여러 영화의 장르가 제작 여건의 열악함에 시달리지 않고 다양하게 제작되어 상영되기를 나뿐만 아니라 영화에 종사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규모 스케일을 가진 몇 편의 영화가 천만관객을 기록하는 것 보다 어렵게 만든 저예산 영화들이 주목을 받을 때 비로소 우리도 문화 선진국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 지금 개최하고 있는 “한국영화 100년사 세미나”에 대해 설명을 해 달라.

 

(안태근 교수) 2010년 11월에 본 세미나를 시작해서 그 후로 매월 극장을 대관하여 지속해 오고 있다.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오래 진행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번 달이 84회이다. 100회까지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한국영화 100년사”라는 나의 저서에 바탕을 둔 행사이고 이제 다음 달에 또 “한국합작영화 100년사”라는 책을 출간할 예정이다. 이것을 연작 시리즈로 기획하고 있으며, 마지막 기획물로 “한중일영화 100년사” 출간을 기획하고 있다. 내가 영화계에서 일하고 공부했던 모든 연구결과물의 총합이다.

 

▶ 인터뷰에 감사하다.

 

(안태근 교수) 감사하다.

 

좌-안태근 교수 우-송길한 작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