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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아시안게임 은메달’ 수영 선수 이다린의 마지막 인터뷰
‘인천 아시안게임 은메달’ 수영 선수 이다린의 마지막 인터뷰
  • 전상일 기자
  • 승인 2018.03.28 12:1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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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아시안게임 여자 혼계형 은메달 … 고교시절 부상으로 은퇴 결심하고 서울대 체교과 입학

어제가 반복 재생되는 오늘 … 반복 재생되는 하루가 싫어 스스로 삶을 마감하려 했던 영화 ‘사랑의 블랙홀’ 빌 머레이의 심정이 곧 그녀의 심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계량하는 온갖 숫자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마음의 난시가 생기고, 뚝뚝 떨어지는 숫자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초조함이 뚜벅뚜벅 가슴 속으로 걸어 들어온다.

1초에 목을 매고, 1초로 인해 모든 것을 평가받는 잔인한 시간들. 그 잔인함에 마음을 허락하며 최선을 다해 뛰어온 13년이었음에도 그녀가 회상하는 절정의 순간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었던 것 같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수많은 기대감이 어깨를 옥죄어 올 때마다 너무 힘들어서 도망가고 싶었다고 나지막하게 말하는 그녀. 말을 이어가던 그녀의 눈가에는 어느 샌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툭하고 건드리면 왈칵 눈물을 쏟아낼 듯 아슬아슬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녀의 눈은 당시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민원을 넣었다고 한다. 이제는 쉬고 싶다고.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이다. 그렇게 조용히 수영계를 떠났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체교과 18학번 이다린으로 제 2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녀는 말했다. 이것이 수영선수 이다린으로서의 마지막 인터뷰라고. 

대한민국 배영의 대표 유망주이자 아시안게임 혼계영 은메달리스트인 수영선수 이다린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신림동의 모 커피숍에서 만난 아시안게임 수영 은메달리스트 이다린

 

 

▼ 요즘 근황을 들어보고 싶다. 어떻게 지내고 있나.

한 번도 공부를 위한 공부는 해본 적이 없는데 요즘 그 힘든걸 해내고 있다. 서울대 체교과 새내기 학생으로서 대학생활에 푹 빠져서 열심히 하고 있다. 내가 뻔대(학번대표)를 맡아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다(웃음). 과 잠바도 맞춰야 하고 해야 할 것이 많다.

 

▼서울대 체교과에 입학하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나.

나는 서울체중에 갈때부터 서울대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서울체중에 가게 된 이유도 일반 학교에 가게 되면 공부를 못 따라갈 까봐 였다.

 

▼ 수영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나.

5살 때 수영을 처음 시작했다. 언니를 따라 시작하게 되었고 내가 승부욕이 좀 있다 보니 언니에게 지기 싫어서 더 열심히 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수영선수의 길을 걷게 되었다.

 

SK텔레콤의 후원을 받았던 대한민국 배영의 대표 유망주 이다린

 

▼ 당시 배영의 굉장한 유망주 였다. SK의 공식적인 후원을 받기도 했다.

맞다. 하지만 SK의 후원을 받으면서 마이클 볼 코치의 지도를 받긴 했어도 기록이 많이 늘지 않았다. 실제로 시합때 나오는 기록이 연습 때도 늘 나오던 기록이었다. 그런데 시합에서 기록이 잘 나오질 않더라, 후원을 받는데 그만큼의 기록이 나오지를 않으니 많이 답답했다.

 

▼이다린 선수를 지도했던 마이클 볼 코치는 어떤 분이었나.

엄청 훈련때 집중하는 타입이다. 다른 코치님은 웜업을 할 때 다른 일을 하기도 하는데 볼 코치는 운동전부터 끝날 때까지 선수들한테 몰입한다. 한 번도 앉은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웜업 할 때도 끊임없이 선수를 독려한다. 열심히 안할 수가 없다.

 

▼박태환 선수와 함께 훈련을 했을 텐데 그는 어떤 선배였나.

테스트를 위해서 나를 포함 총 3명이서 호주를 갔었는데 태환 오빠는 우리 모두를 존중해줬다. “오늘 훈련 어때요?? 괜찮았어요?” 라고 물어봐주셨다. 굉장히 다정했고 부드러웠다. 그때 당시만 해도 내가 성격이 워낙 소극적이어서 사진도 한 장 찍지 못했다.

 

▼ MBC배에서 배영 100m 금메달, 200m 은메달을 따며 국가대표가 되었다.

그때는 막연하게 아시안게임을 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는 했었다. 나는 200m를 더 기대했었다. 그런데 100m에서 1등을 하면서 아시안게임 대표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국가대표가 되어서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시간이 수영 인생중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이다린의 역영 장면(출처 : 연합뉴스)

 

▼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는가.

나는 그때 후원을 받았고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내야했다. 그런 면에서 난 운동선수로서 매우 부족했었다. 더 성숙하게 대처를 할 수 있었을 텐데 당시는 내가 어려서 그런 걸 부담스럽고 힘들어만 했다.

 

▼당시 MBC배에서 여중·고·일반부까지 통틀어 전체 1등의 기록이었다.

운이 좋았다. 그때 기록이 내 개인기록보다도 못 나왔었던 기록이었다. 그런데 선배님들도 그날 컨디션이 다들 안 좋으셨는지 기록이 많이 안 좋더라. 나는 경기를 뛰고 나서 절대 안됐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인천 아시안게임이야기를 해보자.

나에게 아시안게임은 자랑스러운 기록이기도 하지만 부끄러운 기록이기도 하다. 혼계형에서 메달을 따기는 했었지만 개인전에 임하는 태도가 운동선수로서는 맞지 않았다. 나는 이미 MBC배때부터 심리적으로 많이 흔들리고 있었다. 부담감이 너무 커지다보니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다. 내 인생에 다시없는 기회인데 그때 왜 좀 더 즐기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너무 많이 든다. 선수촌 내에서 네일아트도 받을 수 있고 타투도 받을 수 있고 여러 가지 즐길 거리가 있었는데 혼자서 주눅들어있기만 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예선전에서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 적도 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좋은 성적이 나올 리가 없다. 100m 결선 에서는 8위, 200m 결선에서는 7위를 했었다. 

 

여자 혼계형 깜짝 은메달 시상식 장면 - 가장 오른쪽이 이다린(춣처 : 연합뉴스)

 

▼ 대망의 9월 25일 … 아시안게임 대회 7일차 여자수영의 첫 메달이었다.

양지영 , 안세현 등 그때 언니들이 정말 대단했다. 본인 베스트를 1초씩 앞당길 정도로 엄청난 페이스를 보여줬다. 나는 첫 주자였다. 언니들이 긴장하지 말고 열심히 해라라고 이야기를 많이 해줬다. 첫 주자였던 나는 당시 3위로 들어왔다. 나는 잘 못했는데 언니들이 정말 잘해서 은메달을 땄다고 생각하고 있다.

 

▼ 당시 은메달의 소감 좀 이야기 해 달라.

뭔가를 해냈다는 생각이 들어서 언니들이랑 껴안고 한참을 있었다. 내 마음 속에서는 기쁨과 동시에 미안함도 있었다. 나보다 훨씬 더 기록이 좋은 선배님들이 많았는데 내가 메달을 따서 미안하기도 했다. 나는 이런 생각을 매 대회마다 한다. 운동선수로서는 너무 여린 성격인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압박과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나는 운동을 빨리 그만두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 은메달을 딴 그날 밤에 뭘 했나.

우리는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라고 하면서 계속 사진을 찍었다. 그때 초등학교 친구들도 전부다 연락이 왔다. 부모님은 나보다 더 좋아하셨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너무 행복해주셔서 너무 행복했다.

 

▼그 은메달 하나로 힘들었던 수영인생을 보상을 받은 느낌이 드나.

지금도 수영에 대한 미련이 조금은 남아있다. 하지만 내가 수영을 깔끔하게 그만둘 수 있었던 것은 아시안게임 은메달이 크게 작용을 했다. ‘이정도 해봤으면 해볼 꺼 다 해 본거 아닌가’ 하는 들더라. 

 

은메달을 따고 서로 격려하는 대한민국 여자 수영 선수들, - 가장 왼쪽이 이다린(출처 : OSEN)

 

▼ 구체적으로 부상은 어떻게 당하게 된 것인가.

고1 전국체전을 뛰기 위한 선발전을 하기 위해 호주에서 훈련을 하고 들어왔을 당시였다. 그때 컨디션이 참 좋았는데 어느 순간 팔에서 ‘찌직’하는 소리가 나더라. 그때는 일 주일 정도쉬면 될 줄 알았는데 어깨가 안 올라가더라. 그래서 전국체전도 포기했다.

 

▼ 재활 이후에는 한 번도 중학교 때의 기록을 못 찍었다. 

5개월간의 재활이 끝나고 나니까 물을 타는 감각을 잃어버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수영을 하는 타입 이었기에 모든 것을 새로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  자괴감이 많이 들었고 내 기록을 내 스스로 못 받아들이겠더라.

 

▼ 언제 수영을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었나.

고3 올라와서 동계훈련을 열심히 했는데 또 발목 부상을 당했다. 그 여파로 첫 대회(체고대항전)에서 정말 심각한 결과가 나왔다. 그때였던 것 같다. 그때부터 수능 인터넷 강의도 보고 공부 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수영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인가.

아시안게임을 준비할 때다. 그때는 심리적으로 많이 다쳤을 때였다. 당시 숙소가 아파트 한 채였다. 그 한 채가 다 내 숙소였는데, 그 넓은 곳에 혼자 있다 보니까 더 우울하더라. 걱정하실 것 같아서 가족들한테 힘들다는 이야기도 못했다. 친구들도 못 만났고 학교도 못나갔고 오직 기록과 싸워야하는 그 시간이 힘들었다.

 

▼수영을 한 것 후회 안하나.

서울대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면서 잠깐 입시체육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순간에는 후회했었다. 13년 수영을 한 결과가 입시체육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이제는 합격을 했으니 그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한다. 남들에게 내세울 부분도 생겼고, 수영이라는 전문성 있는 분야에서 노력할 수 있는 것 또한 다 내가 수영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미투운동이 화제다. 이다린 선수는 수영을 하면서 그런 어려움은 없었나. 

나는 다행히 그런 부분은 없었다. 수영복을 입으면 신체적인 부분이 많이 노출이 되니까 불편하다고 하는 선수들도 있었는데 나는 워낙 어려서 그런 것을 신경을 못 썼다.

 

▼대한민국 엘리트 선수로 있으면서 아쉬웠던 점을 후배들을 위해서 이야기 해 달라.

내가 중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국가대표와 상비군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비리가 많았다. 나도 살짝 피해를 봤었다. 한 팀에 있으면 그 코치가 상비군에 이름을 넣어주는 그런 식이다. 얼마 전에 이 문제 관련 뉴스에서 보도된 것을 봤는데, 요즘에는 많이 바뀌었다고 하더라.

또 하나 나는 기업의 후원을 받았지만 요즘에는 후원이 많이 부족하다고 들었다. 수영도 돈이 많이 든다. 고등학생들도 훈련비로만 한 달에 100만 원 이상이 들어간다. 이런 지원이 좀 더 체계화되었으면 좋겠다. 

 

대학생으로서 지금은 행복하다는 이다린 선수

 

▼마지막 질문이다. 수영선수 이다린이 아닌 대학생 이다린은 지금 행복한가.

나는 운동을 하면서 절제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놀아도 안 되고 주말에는 쉬어야 하는 등 절제된 생활이 기본이 된다. 나는 내가 이렇게까지 놀 수 있는 사람인지 처음 알았다. 지금은 이렇게까지 행복할 수가 있나~ 하는 느낌이다. 앞으로도 내가 좋아하는 분야를 찾아가면서 더 행복하게 내 길을 개척해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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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2020-02-13 04:09:19
신정초에서 같이 수영하던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ㅋㅋ 여전히 귀엽구나 앞으로 창창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