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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샤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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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수연 기자
  • 승인 2018.07.06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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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 샤갈

  

<샤갈 러브 앤 라이프展>이 6월 5일부터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개최되고 있다. 이 전시회를 계기로 샤갈의 일대기를 조명해 본다. 이 일대기의 내용은 두산백과사전 등을 참조하여 작성하였다.

 

마르크 샤갈(Marc Chagall)은 1887년 7월 7일 벨라루스공화국의 비테프스크에서 유대인 부부의 아홉 자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본명은 모이셰 세갈(Moyshe Shagal)이었으며 후에 마르크 샤갈로 개명했다. 아버지는 거칠고 말이 없는 성격으로 청어 도매상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소규모 잡화상을 운영하며 열정적으로 가족을 보살폈다. 샤갈은 화가로서의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격려해준 어머니에게 늘 감사했다. 비테프스크는 러시아 서부의 유대인 거주 지역으로 샤갈의 그림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영원한 고향이다. 샤갈은 이곳에서 비록 가난했지만, 미술을 공부하며 비교적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1906년 샤갈은 화가인 예후다 펜(Yehuda Pen)의 화실에서 두 달간 공부하고, 1907년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화가가 되기 위한 본격적인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사진 수정작업 조수로 일하면서 간판 그리는 일을 했는데 이러한 일은 훗날 그의 작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09년 즈반체바 학교에 입학하여 레옹 바크스트(Léon Bakst)의 지도를 받았다. 샤갈의 회고에 따르면 바크스트는 그에게 진정한 유럽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었으며, 샤갈로 하여금 러시아를 떠나 파라로 가라고 권했다. 이 시기 샤갈의 작품은 신야수주의적인 요소를 비롯하여 러시아의 성화와 민속예술의 성향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1910년 샤갈은 한 후원자의 재정지원을 얻어 파리로 갔다. 파리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이미지로 샤갈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는 파리를 ‘나의 두 번째 비테프스크’라고 불렀고,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마르크 샤갈’로 바꿨다. 1911년 화실이 몰려 있는 ‘라 뤼슈’(La Ruche, 벌집이라는 뜻)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는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수틴(Chaim Soutine), 아키펭코(Alexandr Archipenko), 레제(Fernand Léger) 같은 젊은 미술가들이 야수파와 입체파 같은 새로운 양식의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는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막스 자코브(Max Jacob), 앙드레 살몽(André Salmon) 같은 시인들과 어울렸고, 특히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았던 시인 블레즈 상드라르(Blaise Cendrars)와는 깊은 우정을 나눴다. 후에 상드라르는 샤갈에게 바치는 시를 쓰기도 했다.

 

샤갈은 파리에 머문 이 시기에 야수주의, 입체주의, 오르피즘 등 새로운 작업방식에 영향을 받아 환상적이고 공상적인 요소가 지배하는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만들어냈다. 1912년 앙데팡당전에 그림 세 점을 전시했고, 이어 살롱도톤에도 그림을 전시하여 괴이하고 환상적이며 특이한 화풍으로 전위파 화가들과 시인들을 놀라게 했다. 1914년에는 현대 미술잡지 『슈트름』을 발간한 베를린의 화랑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샤갈은 비테프스크 지역 미술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비테프스크에 새로 설립한 미술학교의 교장을 맡았다. 하지만 이 영광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실망한 샤갈은 1920년 모스크바로 떠났다. 샤갈은 모스크바에서 무대 미술에 관심을 갖고 고골리(Nikolai Gogol)의 《검찰관》, 숄렘 알레이헴(Sholem Aleichem)의 단막극들의 무대 장치와 의상을 구상했다. 또 모스크바 국립 유대극장의 벽화 장식을 의뢰받아 제작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의 마찰로 샤갈은 1922년 가족과 함께 러시아를 영구히 떠났다. 그는 베를린에서 다시 파리로 옮겨가며 힘든 시기를 보냈는데 그러면서도 라 퐁텐(Jean de La Fontaine)의 『우화』의 삽화, 서커스를 주제로 한 판화 연작 등 새로운 작업들로 항상 바쁘게 움직였다. 샤갈은 1926년 뉴욕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고, 이후 10년 동안 그의 국제적 명성은 높아져갔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대인인 샤갈 가족은 미국으로 도피했다. 미국에서 그는 유럽 여러 지역에서 망명해온 다른 미술가들과 함께 작품을 전시했고, 무대장치 디자인도 했다. 이 시기에 뉴욕은 파리의 뒤를 이어 미술계의 중심으로 대두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뉴욕과 시카고는 물론이고 파리, 런던 등 유럽의 대도시에서 샤갈의 주요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1944년 9월 아내 벨라가 갑자기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사망하자 샤갈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자신의 그림 세계의 여신이며 인생의 동반자인 벨라를 잃고 절망에 빠진 샤갈은 9개월간 붓을 들지 못했다. 이듬해 샤갈은 딸 이다(Ida)의 소개로 버지니아 해거드(Virginia Haggard)라는 젊은 여인을 만나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연인으로 발전했으며 이후 7년 동안 관계를 이어갔다. 1946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샤갈이 40여 년 동안 작업한 작품들을 전시하는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1948년 완전히 프랑스로 돌아와 오르주발에 정착했다. 그해 제25회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판화부문 인터내셔널 상을 받았다. 그는 틈틈이 도자기를 만들고, 석판화 작업을 했다.

 

1952년 발렌티나(바바) 브로드스키(Valentina(Vava) Brodsky)를 만나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은 그에게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그는 다시 성경 삽화작업을 시작했고, 발레 《다프네와 클로에》의 무대장치와 의상을 디자인했으며, 예루살렘의 하다사-히브리 대학 의료센터에 있는 유대교 회당에 설치할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의뢰받는 등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갔다. 그 가운데에는 메츠 대성당과 랭스 대성당을 위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디자인이 있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의 벽화, 니스의 샤갈 성서메시지미술관의 대규모 모자이크 벽화 등이 있다. 또한 파리 오페라극장의 둥근 천장에 거대한 천장화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현대 예술의 한 가운데에서 샤갈은 많은 예술 사조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어느 한 유파에 고착되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낸 샤갈은 눈부신 색채로 시적인 호소력을 담아 상징적이고 미학적인 이미지를 구현해냈다. 그의 환상적인 그림들은 초현실주의의 선조격으로 숭상되기도 하지만, 샤갈은 자신의 작품이 비이성적인 꿈을 그린 것이 아니라 실제의 추억들을 그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샤갈은 1977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대십자 훈장을 받았고, 생존화가로 루브르박물관에 작품이 걸리는 영광을 지켜보았다. 그는 생애 마지막 20년간 남프랑스의 생 폴 드 방스에서 살았고, 1985년 97세의 나이로 그곳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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