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 2024-03-28 20:20 (목)
박종선류 아쟁산조 창시자 박종선 선생
박종선류 아쟁산조 창시자 박종선 선생
  • 황수연 기자
  • 승인 2018.08.14 17: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자 모두가 내 자식이라 생각한다
박종선 선생님

 

민속악을 통달한 재인으로 아쟁산조에 관한 한 현재 국악계에서 독보적인 예인으로 꼽히는 인물이 있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39호 박종선류 아쟁산조 예능보유자 박종선 선생이다. 선생은 그동안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서울전통예술인상, 국무총리 표창, 대한민국 UN 가입공로패, 제10회 아시안게임유공체육부장관 표창 등을 수상한 바 있고, 국립국악원 민속연주단 악장, 국립국악원 민속연주단 예술 감독, 국립국악원 지도위원, 국립중앙극장 국립창극단 음악감독을 역임했다. 현재는 한국아쟁연구회 고문을 맡고 있다.

 

박종선 선생이 처음 아쟁을 시작하게 된 것은 15세 때였다. 3살 때 양친을 모두 잃은 한(恨) 때문이었는지 가슴을 에는 아쟁소리가 미치게 좋았다고 한다. 그의 음악에는 음악을 찾아 모험하던 그의 음악 인생이 절절히 배어있고 드디어 박종선류 아쟁산조를 창시한다.

 

박종선 선생은 1941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3살 때 양친을 모두 잃고 담양의 큰 아버지 박동실(1897~1968) 명창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 박영실은 명고수 김동준의 스승으로, 그리고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박종선 선생의 나이 3살 때 창극 <일목장군>을 연습하다가 급사했다. 그 후 박동실 밑에서 자라게 된다. 큰아버지 박동실은 ‘안중근 의사가’, ‘유관순가’ 등을 지은 판소리 명인이었다. 지금의 인간문화재 및 국악 명인들 가운데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던 당대 대표적인 소리꾼으로 판소리 다섯 바탕(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수긍가, 적벽가)을 자유자재로 부르던 가객이었지만,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어 분단의 역사 속에 묻혀버린 인물이다. 박동실의 큰 딸 박수길은 남도지방에서 날리던 여류명창이었고, 외삼촌 공기남, 공기준도 유명한 소리꾼들이었다. 외삼촌 공기남 역시 한국전쟁 때 납북된다.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박종선 집안은 박동실, 공기남의 납북과 함께 집안은 국악을 멀리 하게 되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어린 박종선은 음악을 버릴 수 없어 14살 즈음에 집을 나왔다.

 

박종선 선생은 집을 나온 후 자신의 마음과도 같았던 구슬픈 아쟁소리에 이끌려 여성창극단의 후신인 '화랑여성창극단'에 입단하였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듣고만 있으면 밥을 안 먹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심부름 등 잡일을 끝낸 후 혼자 아쟁공부를 했다. 낮에 몰래 초를 숨겼다 밤이면 몰래 공연장에 들어가 초를 켜놓고 낮에 들은 노랫소리들을 아쟁으로 옮겨 연주하는 식이었다. 내 모든 마음을 고스란히 아쟁에 쏟아 부었다"고 할 정도로 아쟁은 그의 분신과 같았다. 이 시기에 국극단에 찾아와 단원들에게 새로운 작품도 가르쳐주곤 하던 스승 한일섭을 만나 태평소 시나위와 장구 등을 배우게 된다. 한일섭의 문하에 들어간 것이 20세 전후였는데, 그 동안 짠 15분가량의 아쟁산조를 조심스레 선보였다. 그것을 듣고 있던 스승 한일섭은 "잘 탄다. 맛도 있다. 그러나 두서가 없다"는 것이 그의 평가였다. 그렇게 스승 밑에서 5~6년 간 지내면서 아쟁산조의 진정한 맛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박종선의 집안 내력을 들은 한일섭은 그에게 "선생이라 부르지 말고 형이라 불러라"며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고 한다. 큰아버지가 운영했던 여성창극단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이렇게 10여 년간 국극단을 따라 다니며 배운 민속악기의 실력에 음악성이 더해져 이후 박종선은 민속악기 전반에 통달한 명인이란 소리를 듣게 된다.

 

이후 25살 무렵까지 박종선 선생은 햇님여성구극단, 송죽여성국극단, 진경여성국극단 등을 옮겨다니며 유랑생활을 했다. 갖은 고생과 굶주림이 엄습할 때마다 박동실이 작사, 작곡한 '안중근 열사가', '김유신 보국가', '건국가' 등을 흥얼거리며 삶의 의지를 되살렸다.

 

이처럼 어려운 삶을 살아온 세월만큼 선생의 아쟁 소리에는 버거운 한의 음색이 물씬 묻어난다. 박종선 선생의 삶이 아쟁의 음색으로 표현되고 그 한을 뚫고 나오는 우리민족의 강인한 힘이 어우러져 예술로 승화된다. 박종선 선생의 아쟁산조는 전통적인 아쟁 예술의 극치로서 우리민족의 한이 서린 가락과 흥이 넘치는 가락으로 듣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끼칠 만큼 매혹적”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그의 스승 한일섭이 아쟁산조의 창시자라면 그는 아쟁산조를 우리 민족의 혼을 담은 숭고한 예술적 형태로 자리 매김한 아쟁의 명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박종선 선생은 2009년 3월 5일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39호 박종선류 아쟁 산조’의 예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오늘날 각 대학마다 아쟁 전공자 중 그의 가락을 타지 않는 학생이 없고 각 국악고등학교에서도 쉽게 그의 가락을 들을 수 있을 만큼 널리 퍼져있다. 또한 그가 키운 제자들은 국립국악단체, 시립·도립 단체, 대학 등에서 그의 산조가락을 연주하고 가르치고 있다.

 

 

▶ 대대로 국악 명문가로 알고 있다. 소개를 해 달라.

 

아버지 박영실은 명고수 김동준의 스승으로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3살 때 창극 <일목장군>을 연습하다가 급사했다. 그 후 담양의 큰아버지 박동실 명창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또한 외조부 공창식은 전설적인 명창 임방울의 스승이었고 외삼촌 공기남, 공기준도 유명한 소리꾼들이었다. 그야말로 한 시대를 날렸다. 후대로 아들 딸, 손자도 모두 국악을 하고 있다.

 

▶ 자녀들도 대를 이어가고 있다. 어떤 마음이신지.

 

아들딸이 국립국악악단, 국립창극단에 있다. 아들 딸 뿐만 아니라 제자 모두 다 내 자식이라고 생각한다. 국악을 하니까 좋다. 하지만 중간에 그만 두는 것이 많이 아쉽다. 끝까지 공부했으면 좋겠는데 각자의 사정으로 그만 두는 제자들이 있어 아쉽고 안타깝다. 아쟁에서는 한국에서 나의 제자가 가장 많다. 우리나라 최초로 (아쟁)문화재가 되었고 아쟁 부문에서 나름대로 크게 이루어 놓았다고 생각한다.

 

▶ 아쟁의 역사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저변확대가 이루어 졌는가.

 

산조아쟁의 역사는 길지 않지만 정악아쟁은 고려 예종 때 들어와서 역사가 크다. 큰 정악악기를 민속음악에 맞게 바꾼 것이 산조아쟁 악기이기 때문에 아쟁의 역사가 짧은 것은 아니다. 아쟁에서 1세대가 나의 스승이신 한일섭 선생님이고 내가 2세대이다. 한일섭 선생님이 짜놓으신 15분 정도의 가락에 내가 가락을 더해 30분짜리를 만들었다. 젊었을 때부터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수제자 이태백은 대학에서 아쟁전공 1호이다. 그때는 아쟁전공이 없었는데 새로 만들면서 박사까지 하고 교수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제자들이 우리나라 각 지역에 박종선류로 활동을 하고 있다. 제자의 제자, 또 그제자의 제자로 3대째 내려오고 있다. 대학에 아쟁전공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지금 어마어마하게 많이 활성화가 되어있다. 1986년에 처음 아쟁전공이 생겼을 때는 하나의 대학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모든 대학에 아쟁전공이 있다.

 

▶ 왜 대학에 아쟁전공이 없었나.

 

아쟁이란 악기가 어려운 악기이다. 아쟁이란 악기가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 때문 일 것이다. 아쟁을 잘하는 선생님들은 정말 대가이다. 명인 몇 분만 있고 없었다. 배우기도 어렵고 성음 내기도 어려워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 아쟁이 연주하기 힘든 악기로 알고 있다.

 

농현을 하는 손과 활을 쓰는 손이 달라 어려움이 있다. 아쟁이 사람 목소리와 가장 비슷하다. 활대로 하는 악기가 까다롭다. 하지만 아쟁의 장점은 활대로도 소리를 낼 수 있고 손으로 튕겨서 소리를 낼 수 있다. 가야금, 거문고, 해금 등 여러 가지 효과를 낼 수 있다. 미래의 가장 확실한 악기는 아쟁이라는 말이 있다.

 

▶ 아쟁, 대금(젓대), 태평소(새납), 장구, 가야금, 북. 박씨 등 열 가지 악기를 다룬다고 들었다.

 

아쟁뿐만 아니라 대금도 가르쳤었고 태평소도 잘했다. 가야금, 북, 장구, 꽹과리 등 많은 악기를 다룰 수 있다.

 

▶ 많은 악기를 다룰 수 있는데 아쟁을 특히 좋아한 이유는?

 

옛날 연극할 때 효과음으로 아쟁 소리가 정말 좋았다. 그 소리에 반해 아쟁을 하게 되었다. 가야금, 거문고는 산조가 있는데 아쟁이 없더라. 그래서 아쟁 산조를 만들었다. 아쟁은 소리를 끊김 없이 계속 낼 수 있는 악기이다. 모두가 힘든 시기였기 때문에 그 시대에 슬픈 음악이 대세였다. 그 슬픈 음악을 가장 잘 표현 할 수 있는 악기는 아쟁이다.

 

▶ 15살 어린나이에 여성창극단의 후신인 '화랑여성창극단'에 입단하여 아쟁을 시작했다.

 

그 시절에 아쟁 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아쟁이라는 악기가 없어서 가야금에 활은 개나리 나무에 송진을 칠해서 소리를 냈다. 요즘 쓰는 말총 활대 보다 나무 활대로 더 부드러운 소리를 낼 정도로 잘했다.

 

▶ 스승 한일섭은 어떤 분인가.

 

산조를 구성하고 있는 우조와 계면조에서 한일섭 선생님은 우조를 많이 하셨고 계면조는 내가 만들었다. 시대적인 상황과 나의 처지에서 슬픈 계면음악 가락을 많이 짰다. 한일섭 선생님의 우조를 엮어 하나의 산조가 만들어졌고 ‘박종선류’가 완성 되었다. 민속음악의 가장 큰 특징이 변이 이다. 옛날의 산조 10분짜리를 요즘은 1시간도 탄다. 그만큼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한일섭 선생님의 10분 정도 길이의 산조에 나의 가락을 얹어 정리하여 지금의 30분 내외의 '박종선류 아쟁산조'를 만들어 발전시켰다.

 

▶ 아쟁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린다.

 

선생님이 많이 없던 나의 시대와는 다르게 요즘은 많은 좋은 선생님들이 있으니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음악을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