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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수 위원 “현장 복귀? 나는 지금이 행복하다 … 삼성에 서운함 없어”'
이만수 위원 “현장 복귀? 나는 지금이 행복하다 … 삼성에 서운함 없어”'
  • 전상일 기자
  • 승인 2018.12.23 13: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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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에 이만수배 전국중학야구대회 창설 … 언젠가 라오스에 야구장이 만들어져 아시아대회를 여는 것이 남은 20년의 꿈”

(한국스포츠통신 = 전상일 기자). 따사로운 햇살이 볼을 간지럽히는 감촉이 좋은 어느 봄 같은 겨울 오후.

상인천중학교에 레전드 이만수 KBO위성위원회 부위원장이 방문했다. 아이들과 만남을 위해 중학교를 찾은 이만수 위원장은 60이 넘은 나이에도 “유니폼만 입으면 가만히 있질 못 하겠다”며 운동장을 서성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장난기 넘치는 동네 아저씨 다름 아닌 그이지만 이만수는 한국프로야구의 레전드 of 레전드다. 원조 홈런왕 헐크 이만수. 한국프로야구는 그의 안타를 시작으로 태동했고 그의 홈런으로 맥동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가 이제는 더 큰 일을 위해 뛰고 있다. 재능기부활동이 그것이다. 이만수 위원은 이것이 자신이 해야할 일이며 누군가는 선구자가 되어야하는 일이라고 입버릇 처럼 말하곤 한다.

상인천중학교 선수들을 상대로 2시간의 재능기부를 마치고 돌아가려는 이만수 위원을 졸라 아주 약간의 시간을 얻어냈다. 예상치 못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길고 화려한 야구 인생을 정리하기에 허락된 시간이 너무나도 짧아 흘러가는 시간이 인터뷰 내내 야속하고 각박하게만 느껴졌다.  

 

1. “삼성에 대한 서운함?? 다 털어낸 지 오래” 

이만수는 삼성라이온즈의 역사이자 한국프로야구의 역사 그 자체다. 故 장효조 코치와 함께 삼성 프렌차이즈 스타 계보의 한 축이었다. 한국프로야구 1호 안타, 1호 타점, 1호 홈런, 100호 홈런, 200호 홈런, 최초의 트리플 크라운 등 각종 신기록을 양산하며 대한민국 프로야구사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상징적인 인물이 바로 헐크 이만수다. 

 

상인천중학교에 재능기부를 하기 위해 찾아온 이만수 KBO육성위원회 부위원장

 

Q)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이다. 그런데 요즘 더 젊어지시는 것 같다. 도대체 그 비결이 뭔가. 기자에게도 좀 알려 달라.  
A) 그런 게 어디 있나(웃음). 그런 것 없다. 여전히 술, 담배 안하는 것 빼고는 이렇게 아이들하고 같이 어울려 노는 것이 그 비결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아이들하고 함께 야구를 하다보면 몸도 마음도 더 젊어진다.  

Q) 본 기자가 고교 야구 쪽을 많이 다루다 보니 문득 위원님의 대구상고 시절이 궁금해진다. 
A) 내 대구상고 시절? 매년 우승했었다. 내가 있을 때 경북고는 우리에게 안됐었다(웃음). 박영진 투수도 있었고 오대석도 있었고 김시진도 있었고 좋은 선수들이 정말 여러 명 있었다. 당시 77년도 청룡기에서 우승 했었다. 그리고 내가 그때 4관왕 했었다. 최우수선수상, 타격, 최다안타 타점상을 했다. 당시에는 홈런상 같은 개념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잘 알겠지만 김시진과는 나이는 동갑이고 학년은 1년 선배다. 내가 중학교 때 1년 유급을 했었기때문이다. 

 

대구상고 1977년 청룡기 우승 당시 사진(출처 : 문화뉴스)

 

이만수 위원의 당시 기사 사진들(이미지출처 : 주간스포츠)

 

프로야구 1호홈런(이미지출처 : 연합뉴스)

 

Q) 위원님은 원래부터 포수였었던 것인가.   
A) 사실 대구중학교 때는 투수하고 포수를 둘 다 했었다. 그런데 중학교 당시에 피칭을 너무 많이 시켜서 팔이 굽었다. 그게 싫어서 포수를 했다.  

Q) 한양대학교에서도 김시진 감독님과 더불어서 엄청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A) 우승은 매년 했었다. 당시는 공부는 서울대학교지만 야구는 한양대학교가 하버드대학급이라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당시 한양대학교가 야구를 잘했었다(김시진 전 감독과는 대구상고 동문, 한양대 동문, 삼성 라이온즈 동문으로 원조 찰떡궁합으로 알려져 있다)

Q) 위원님께서는 여러 가지 기록이 있으신 것으로 알고 있다. 그중에서 감독님이 가장 애착이 가는 기록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A) 첫 안타, 첫 타점, 첫 홈런 이 세 가지가 가장 인상에 남는다. 이것은 프로야구가 없어지지 않는 이상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프로야구 16년 동안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 또한 첫 안타, 첫 타점, 첫 홈런이다. 나는 삼성라이온즈 창단멤버고 개막전에서 처음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것이 가장 기억이 남는다. 

Q) 故 장효조 코치님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 이만수 위원님이실 것이다. 어떤 분이셨는지 살짝만 이야기해 달라. 
A) 좋은 선수였다. 가깝게 지냈다. 타격에 대해서는 연습도 같이 많이 했었던 기억도 난다. 장효조 선배가 3번을 치고 내가 4번을 쳤었으니까… 솔직히 보이지 않는 라이벌 의식도 꽤 있었다. 정말 대단한 선배였고 선수였다.   

 

이만수 위원의 현역시절 모습(이미지출처 : 삼성라이온즈)

 

Q) 사실 위원님은 워낙 출중한 공격력 때문에 상대적으로 수비가 떨어진다는 비판도 많이 받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A) 옛날에는 그런 말이 많았다. 아무래도 내가 공격형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 쓰면 경기력에 영향을 미친다. 기사 같은 것을 보고 마음이 상하면 슬럼프가 올수 있으니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의 본분에 최선을 다하라고 후배들에게도 늘 이야기해준다. 

Q) 감독님의 현역시절 관련해서는 마지막질문이다. 1998년 감독님은 은퇴식도 못 하고 팀에서 떠나가셨다. 삼성 올드팬들 중에서는 그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팬들도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많이 서운하지 않으셨는가.  
A) (잠시 생각에 잠기시다가 웃음을 지으며) 이제 그런 것은 없다. 세월이 많이 지났고 나도 나이를 많이 먹었다. 이제 과거의 일을 갖고 서운해 하지 않는다. 은퇴식은 없었지만 영구결번도 되어있고, 무엇보다 현재 나는 삼성라이온즈 OB회장을 3년째 맡고 있다. 은퇴한 삼성라이온즈 선수들하고 지금도 신나게 잘 만나고 다닌다. 

 


2. “SK에서의 감독생활, 성적이 안 나서 힘들었다”

이만수 위원에게 SK의 감독생활은 아쉬움으로 점철된 시간 다름 아니다. 그는  SK에서의 시간에 대해 깊게 이야기가 하지 않았다. 올해 SK의 우승을 감동적으로 봤다는 이만수 위원이 SK 감독시절 가졌던 딱 한가지 아쉬움은 팬들에게 우승을 선사하지 못하고 떠나온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만수 감독 SK와이번스 감독시절(출처 : 연합뉴스)
SK와이번스 감독시절(출처 : 연합뉴스)

 

Q) 프로 감독이 되셨다. SK에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 어떤 부분인지 궁금하다. 
A) 성적이 안 난 것이 가장 힘들었고 팬분들에게 죄송했다. 프로가 다른 것이 있는가. 부상 선수가 많기도 했지만 그런 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나의 능력부족이라고 생각한다.  
 
Q) 그래도 감독 대행시절에도 그랬고 두 번째 해에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않으셨나. 
A) 맞다. 공교롭게도 그때마다 삼성라이온즈를 만났다. 


Q) ‘팬티 세레모니’ 등 당시에는 파격적인 팬서비스를 많이 하셨다. 당시 감독님께서 워낙 활달하셔서 지도자가 근엄하지 못하다는 비판도 많이 받으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A) 맞다.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 문화가 지도자는 근엄하고 무게를 잡아야 하는데 미국에서 온 이상한 사람이 옷을 벗고 뛰고 하니까 언론에서 난리가 났다. 많이 두들겨 맞았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서 그런지 많은 야구인 들이 팬들하고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소통하고 액션도 커지더라. 

Q) 감독님은 감독 시절에 선수들에게 가장 많이 강조하신 부분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 
A) 기본, 집중, 팀 이다. 나는 그것을 FFT라고 부르는데 그것을 더그아웃에 항상 붙여놨었다. 

 


3. “현장 복귀??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너무 좋다” 

이만수 위원을 볼 때마다 사람들이 묻는다고 한다. 현장에 돌아오실 생각은 없냐고. 그럴 때 마다 그가 하는 대답은 한결같다.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새로운 자리를 얻기 위해 현장 주위를 맴돌기보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라고 말이다.  

그는 나지막하게 읇조린다. 나는 주춧돌만 놔주고 갈 뿐이라고 …  언젠가 그 뒤는 나와 뜻을 함께하는 후배들이 이어줄 것을 기대한다고....   

 

선수들에게 타격시범을 보이고 있는 이만수 위원 

 

Q) 내년에 이만수배 중학야구대회가 창설된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정말인가. 
A) 사실이다. 지금 그것을 하기위해서 6개월 동안 쫒아 다녔다. 스폰서가 제일 중요하다.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아제약’에서 스폰서를 해주기로 했다. 조아제약 대표님과 함께 인천야구협회를 찾아갔다. 일단 중학교 전국대회이기 때문에 대한야구협회 승인을 받아야 한다. 대한야구협회의 승인은 큰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하고 두 번째는 문체부에서 승인을 해줘야 한다. 거기서 승인이 안 되면 안 되니까 현재는 그 부분이 가장 문제라고 생각되고 있다. 

Q) 라오스에 여자야구팀을 결성해서 한국에 참가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도 어디에서 들었다. 
A) 여자야구팀은 지금도 있다. 라오스는 모계사회다. 여자야구가 남자보다 훨씬 더 세다. 사실 그래서 여자야구를 했으면 더 나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언젠가 한국에도 선을 보일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한국을 함께 찾아 한국대표팀과 같이 경기를 할 일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라오스 야구단 감독을 맡고 있는 이만수 위원장(출처 : 연합뉴스)
라오스 야구단 감독을 맡고 있는 이만수 위원장(출처 : 연합뉴스)

 

Q) 혹시 주변에서 현장복귀에 대한 독촉은 없으신가. 현장에 복귀하실 의향은 없으신지 궁금하다. 
A) 내가 인터뷰를 하면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이 그것이다. 그런데 내가 현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 주위를 맴돌게 되면 나의 인생은 없어진다. 재능기부를 하다기회가 되면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인연이 안되면 계속 재능기부를 하면 된다. 현장복귀에 연연 할 필요가 없다. 거기에 들어가려고 계속 그 주위를 맴도는 인생이 얼마나 각박하겠나. 그런 인생은 살지 않으려고 생각한다. 

Q) 그래도 아직 이렇게 정정하신데 언젠가 한 번쯤은 다시 한번 이만수의 꿈을 펼치고자 하는 큰 목표는 있으시지 않나.    
A) 나는 지금 이 일이 너무 좋다. 그리고 누군가는 해야 한다. 우리나라 프로야구도 많이 변했다. 기부문화, 봉사문화도 분명히 필요하다. 누군가 선구자가 있어야 한다. 그런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에 나는 만족한다. 물론 힘들고 어려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하고 같이 이렇게 뛰어놀다보면 너무 재미있다. 동심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다른데서나 “내가 이만수다”라고 무게 잡고 다니지 이런 곳에서는 나도 같은 나이라 생각하고 어울리면서 즐겁게 어울리고 있다. 

Q) 감사한 말씀이다. 마지막 질문이다. 2019년도 이만수 위원님의 목표가 궁금하다. 
A) 앞으로 20년 프로젝트가 있다. 당장 내년부터 중학교 전국대회가 유치되었으면 하는 바램이고 20년 프로젝트는 라오스에 야구장이 만들어져서 아시아대회, 세계대회를 여는 것이 나의 20년 마지막 꿈이다. 나는 그 주춧돌만 놔주고 그냥 갈 뿐이다. 그 뒤는 후배들이 잘 알아서 맡아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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