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을 켜던 초등학생이 성악가가 되어 무대를 누볐다. 하지만 무대 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것보다 누군가의 배고픔을, 누군가의 서러움을 알아주고 싶어 ‘새로운’이라는 이탈리아어를 본 딴 ‘누오바 오페라단’을 창단한 정이 많은 오페라 단장, 강민우 단장과의 인터뷰를 가졌다.
강민우 단장은 고등학생 시절, 선생님의 권유로 처음 성악을 접했다.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해 동네에서 소문난 가수였던 강민우 단장은 “노래라는 게 음감이라는 걸 타고나야 유리하다. 어릴 때 타고난 음감과 음악적인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하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그렇게 노래 잘하던 고등학생은 세종대학교에 입학 후, 이탈리아 유학을 선택했다. 당시 유학을 떠나기 위해서는 지금과는 조금 다른 절차를 거쳤다는 강민우 단장은 “국립음악원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먼저 대사관을 통해 신청서를 받아서 원서를 접수해야 했다. 그 후에 테이프를 이탈리아로 보내고, 현지 테이프 테스팅이 끝난 후 연락이 오면 그때 유학을 갈 수 있었다.”며 당시 복잡한 유학 시스템을 언급했다.
우여곡절 끝에 이탈리아 행 비행기에 올라탄 강민우 단장은 가장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 바로 언어였다. “처음 유학을 가서는 언어가 달랐기 때문에 언어에 치중했다. 언어가 안 되면 일상생활도, 음악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일 년 정도는 언어 배우는 것과 학교에 몰두했다.” 일 년 정도 언어에 치중하며 자신의 미래를 위해 준비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03년, 한국으로 귀국한 강민우 단장은 국립 오페라단에 입단했다. 그러던 중 오페라단의 국장 자리를 제의받았고, 고민 끝에 수락했다. 당시 국장으로서의 행보에 단원들은 직접 오페라단을 운영해볼 것을 권유했다.
“제가 단장으로 오페라단을 만든다면 도움을 주겠다는 성악가들이 7~8명 정도 있었다. 저는 그럴 처지가 안 된다고 말했더니 다들 십시일반 돕겠다고 했다.”
그렇게 의기투합이 돼 작품을 만들며 누오바(Nuova), 이탈리아어로 새로운 이라는 뜻을 가진 오페라단이 창단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하지 않았던 베르테르라는 작품을 유치했었다. 그 작품은 오페라로 만들어진 게 있지만, 한국에서는 베르테르라는 작품의 오케스트라 버전은 한 번도 공연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 그래서 ‘누오바 오페라단’의 이름에 걸맞게 이제껏 한국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누오바 오페라단은 그 낯섦을 신선함으로 변화시켜 한국 사람들에게 다가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한 모습들은 관객을 사로잡았다.
“5~6년 정도 하다 보니 ‘누오바 오페라단’은 다른 오페라단과 달리 새로운 작품을 많이 선보인다고 소문이 나며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국 오페라에 발을 들이게 된 강민우 단장과 누오바 오페라단은 제6회 대한민국 오페라 페스티벌에 아드리아나 르쿠브뢰르를 선보였고, 이후에도 카르멘, 라보엠, 호프만의 이야기, 미호뎐 등의 작품으로 관중들과 소통했다.
좋고 괜찮은 작품을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시했던 것은 신진 성악가들의 설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새로운 사람 즉,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 설 무대가 없다. 오디션 보는 것도 드물고, 신진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이 없다.”
이 모든 것들은 성악가 강민우로 자신이 생활해봤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신진 성악가들의 발판이 되어주고자 갖은 노력을 다한 강민우 단장은 ‘찾아가는 음악회’라는 프로젝트 공모에 지원했다. ‘찾아가는 음악회’는 정부 차원에서 문화생활을 경험하기 힘든 오지의 사람들을 찾아가 공연을 해주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국립오페라단이 전담하여 운영해왔다. 그러던 중 국립오페라단에서 이 프로젝트를 민간오페라단과 함께하면 어떻겠냐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렇게 공모를 시작하게 됐던 것이다.
강민우 단장은 당선된 직후 “젊은 학생 중 대학 졸업생, 유학생 혹은 유학을 준비 중인 친구들에게 자신을 알릴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고, 프로젝트를 위해 오디션을 실시했다.”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성악가들과 함께 오지로 떠난 강민우 단장은 그곳에서 또 다른 즐거움을 맛봤다고 했다.
“소외지역, 문화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곳을 가다 보니 어떤 곳은 전교생인 6명이 전부인 곳도 있었다. 하지만 인원수보다는 ‘찾아가는 음악회’를 통해 아이들이 오페라라는 걸 접하기도 하고, 성악가라는 꿈을 꿀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어 좋았다.”
한 달에 길게는 2주, 짧게는 1주 정도 오지로 가 공연을 한다는 강민우 단장과 누오바 오페라단은 11월 셋째 주에도 공연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오페라를 대중에게 더욱 더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과 신진 성악가들의 어려움을 헤아려주는 정 많은 오페라 단장으로 꼽히는 강민우 단장이긴 하지만 오페라단 운영에 있어서만큼은 어려움이 많은 듯 보였다.
“오페라단을 운영하면서 어느 정도 이득을 취하는 게 필요하지만 사실 현실적으로 이득을 추구하기 힘들다. 개인적으로는 아이들 레슨, 학교 강의, 세미나 정도도 하면서 지낸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걸 안 하면 되지 않느냐?’라고 말을 한다. 그런데 만약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 오페라 단장을 한다면 가수들의 배고픈 마음, 설 곳이 없어 서러운 그 마음 그런 것들을 누가 알아주겠느냐? 이미 경험해봤기 때문에 공감도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단원들과 이야기 할 때 호소력 있게 전해지는 것이라 본다.”
벌써 오페라 단장으로 13년 차에 접어든 강민우 단장에게 오페라의 대중성에 관해 물으니 “한국인들이 아는 오페라로는 한 20개 정도는 될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오페라라는 장르는 낯설게 느껴진다. 선진국을 기준으로 볼 때 나라의 경제가 발전하면 문화 또한 함께 성장한다. 그런 면에 비추어 본다면 한국은 다른 면에 있어서는 강하다 볼 수 있지만, 문화·예술 쪽으로는 선진국을 따라가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서 오페라의 대중성을 논하기엔 어려움이 많은 장르이긴 하지만 발전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흥 많은 민족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언젠가는 클래식 음악도 마음 속 깊숙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가령 아무리 어려운 가정의 신혼부부라 하더라도 태교를 위해 모차르트 음악을 들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로 하여금 클래식 음악이 점차 한국인의 삶에 녹아든다면 보다 빠른 시일 내에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페라의 대중성과 발전을 위해 많은 지원이 필요함을 토로했다.
“내가 알기론 우리와 같은 민간단체에 대한 정부 지원의 길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정부 지원 심사 기준은 정형화되어 있어 위험 부담을 키우지 않고자 하는 듯 보인다. 이러한 부분들이 개선되어 우리와 같은 민간 오페라 한 단체, 한 단체가 꾸준히 십 년, 이십 년을 운영하고, 제대로 된 작품을 하는 단체에 적극적인 지원이 이루어진다면 한국에서의 문화·예술도 점차 선진국과 같이 힘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극적인 지원만이 한국에서 오페라도, 신진 성악가들도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일생일대의 기회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을 위해 우리 또한 목소리를 내줘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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