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레전드’ 임창용을 추억하는 시간 … 그가 팬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편지
[인터뷰] ‘레전드’ 임창용을 추억하는 시간 … 그가 팬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편지
  • 전상일 기자
  • 승인 2019.05.26 18:50
  • 댓글 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또 하나의 별이 마운드를 떠났다. 
지난 3월 11일 임창용(43, 전 KIA타이거즈)은 에이전트를 맡은 스포츠인텔리전스 그룹을 통해 “24년간의 프로야구 선수 생활을 마치고 은퇴를 결정했다”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팬들은 아직도 140km/h 후반을 웃도는 엄청난 공을 던지는 그가 이렇게 은퇴한다는 것에 많은 아쉬움을 표현했다. 

그가 프로선수로 활약한 24년 동안 쌓은 업적은 어마어마하다. 1998년 34세이브로 첫 세이브왕을 따낸 이후 1999년 사상 첫 50세이브포인트 돌파 및 세이브 1위에 오르며 애니콜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2001년에는 선발 투수로 변신해 14승을 거두었다. 이후 17승(2002년), 13승(2003년)을 거두며 삼성의 사상 첫 우승에 공헌했다. 마무리로 돌아간 2004년 36세이브(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팔꿈치 인대접합 수술 이후 2008년 일본 무대에 진출한 임창용은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총 238경기에서 11승 128세이브를 기록했다. 2009년에는 팬 투표로 올스타전에 출전하기로 했다. 그 이후 ‘1+1년’에 최대 500만 달러(약 54억 원)에 시카고 컵스와 스플릿 계약을 맺었고, 2013년 9월 빅리그의 부름을 받고 메이저리그 마운드에서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는 솔직담백한 사람이다. 자신의 과거를 미화하지도, 숨기지도 않았다. 보정이라는 것이 없는 날 것 그대로의 솔직한 추억이다. 임창용이라는 레전드 선수가 기자 앞에서 꺼내놓은 추억의 편린들은 그래서 더욱 소중했고 또 신선했다. 


 

1. 내노라하는 선배들이 무서워 숨도 못 쉬던 해태의 '삥발이(?)' 시절  

임창용은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전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대진 코치와 함께 최후의 최후까지 무너져가는 해태의 희망으로 남았다. 임창용은 당시 무서웠던 선배들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말한다. 신인은 자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게 하면서 키워가는 것이라고. 불패의 마무리로 한국 프로야구를 호령했던 본인도 숱한 선배들을 극복하고 또 그들에게 배우며 성장했다고 말이다.   

 

 

과거의 추억을 담담하고 솔직하게 풀어놓고 있는 임창용 전 선수

 


Q) 해태에 있었을 당시 이야기를 좀 해 달라. 
A) 해태에 처음 입단했을 때 나는 김응용 감독님보다 선배들이 더 무서웠었다. 감독님 눈치보다 선배들 눈치를 더 많이 봤던 것 같다. 선동열, 장채근, 김종모, 이호성, 이종범, 이건열 등 한 시대를 풍미했었던 선수들이 당시 선배들이었다. 투수조에서는 송유석, 이강철, 조계현, 강태원, 김정수 등이 있었다. 막내로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워낙 어리고 혈기가 왕성한 시절이었으니 날 새고 놀다가 연습하러 가기도 했다. 밤을 새우면 피곤하다. 그래도 선배들이 운동이 안 끝나고 계속하고 있으면 나도 쉴 수가 없다. 그래서 끝까지 함께 운동하고 그랬다. 그때 선배들을 보면서 나도 많이 배웠다. 

Q) 갑자기 문득 궁금해진다. 어떻게 하다가 해태의 마무리로 발탁된 것인가. 
A) 그때 지금은 고인이 된 김상진이 당시 선발로 나간 적이 있었다. 초반에 실점을 많이 해서 내가 2회부터 6회까지 던지고 승리투수가 된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중간투수를 하게 되었다. 1년 차 때는 패전조, 2년 차 때는 중간으로 들어가서 7승 7패 정도 했던 것 같고, 3년 차 때는 조계현-이대진-이강철-최향남 선배 등에 이어 5선발로 시즌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5선발이니까 개막전 당시 4경기나 시간이 있어서 불펜에서 느긋하게 연습투구를 하고 있었다. 당시 마무리 투수가 김정수 선배였는데 3-1로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블론세이브를 하며 9회 초에 3-3 동점이 되고 1아웃 12루가 되었다. 김응용 감독님이 내가 연습투구 하는 것을 보시더니 나보고 나가라고 하시더라. 그때부터 마무리 역할을 맡게 되었다.   

Q) 약간 다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최근 한국프로야구가 베테랑 선수들에게 각박한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A) 팬들은 베테랑 선수에게 환호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구단들은 이런 부분들을 잘 이용 못 하는 것 같다. 베테랑들은 찬스에 강하고 분위기를 반전을 시킬 능력이 있다. 9회 말 투아웃 만루에 종범이 형이 나온다고 상상해보라. 분위기가 확 바뀐다. 나오는 순간 관중들이 난리가 나지 않겠나. 그러면서 분위기가 우리에게로 넘어온다. 신인들은 경쟁 상대도 있어야 하고 보고 배울 사람도 있어야 한다. 베테랑들을 다 내보내고 어린 선수들만 기용하면 어린 선수들은 '내가 이 정도 하는 선수야'라고 자만을 하게 된다. 나도 1군에 올라가서 김정수 선배 등 숱한 선배들을 극복하고, 또 그분들에게 배우면서 마무리 투수가 되었다. 

 

 

임창용이 추억하는 무서웠던 해태의 선배들(출처 : 나무위키)
임창용이 추억하는 무서웠던 해태의 선배들(출처 : 나무위키)

 

 

Q) 숱한 명장들을 겪어보셨다. 해태에 들어와서 만났던 김성근 감독님과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A) 김성근 감독님하고는 정이 많이 들었다. 프로에 입단하자마자 첫 인연이었다. 고등학교에 졸업하기도 전에 뵌 것이기 때문에 정말 무서웠다. 그런데 알아갈수록 유머도 있으시고 야구에 대한 열정이 넘쳐난다. 야구에 대한 지식도 누구보다 많이 갖추고 계시기 때문에 나중에는 무섭다기보다 존경하게 되더라. 김 감독님은 불만을 이야기하면 잘 받아주신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네 생각도 그래? 나도 그래.” 라고 말씀을 하시곤 한다. 물론 그분도 자신만의 고집이 있으시니 아닌 것은 확실히 아니라고 말씀하시지만, 여하튼 나를 많이 이해하려고 노력하신 것은 분명하다.  

Q) 김응용 감독님과는 해태와 삼성에서 가장 오랜 인연으로 함께했다.  
A) 내가 신인 때 1군에서 처음 뵌 감독님이시다. 그리고 오랜 기간을 모신 분이기도 하다. 김응용 감독님은 성격이 굉장히 불같으시다. 나도 어릴 때는 타협을 모르는 성격이다 보니 많이 부딪혔다. 연봉 갖고 마찰이 있었던 적도 있었다. 나는 삼성에서 스프링캠프에 갈 때까지도 연봉계약이 안 돼서 “운동을 못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던 적이 있다. 감독님은 “계약은 계약이고 운동은 운동이지” 라고 말씀하시면서 훈련일정을 따라올 것을 요구하셨다. 내 생각은 달랐다. 내가 운동을 한다는 것은 ‘이 팀을 위해 열심히 하겠다’는 것이고 운동을 안 한다는 것은 ‘계약이 안 되면  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구단에 어필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독님은 이런 부분을 이해 못 하시더라. 야구도 직업의 일환인데 그런 부분들을 인정 안 해주셔서 서운했다. 당시 화가 나서 한국에 들어와 버렸다(웃음). 

Q) 방콕아시안게임 직후 양준혁 선배와 트레이드되었을 때 심경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A) 당시 해태는 나를 팔아야만 운영이 되는 팀이었기 때문에 무조건 팀을 나갈 것은 예상하였다. 그때 선동열 선배가 가장 먼저 일본에 팔렸고, 이종범 선배가 그다음에 팔렸고 남은 것은 나와 이대진 선배뿐이었다. 그래서 ‘나도 일본이나 미국으로 팔리겠지’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는 순간 삼성으로 트레이드되었다는 기사가 나더라. 당시는 기분이 매우 나빴다. 솔직히 나는 두 선배처럼 해외로 나가고 싶었다. 미국이든 일본이든 가서 잘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 아버지는 화나가서 구단 사무실까지 가서 난리를 쳤다. 당시 해태가 주축 선수를 파는 것 때문에 욕을 많이 먹고 있었다. 나까지 외국에 팔면 욕을 많이 먹을 것 같아서 현금 + 선수 3명과 함께 트레이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2. 모든 것을 불태웠다 - 삼성왕조의 주역이 된 투혼의 역사

그의 삼성 시절은 ‘투혼’이라는 단어가 매우 적절했던 시기였다. 1999년 삼성으로 오자마자 그가 남긴 기록은 138.2이닝 12승 38세이브, 역대 최초 50세이브포인트 경신에 방어율 타이틀까지 차지하며 리그 최고의 투수로 우뚝 섰다. 얼마나 자주 등판을 했는지 ‘애니콜’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킬 정도였다. 임창용은 말한다. 당시 플레이오프에서 더그아웃에 앉아있으면 팔이 덜덜 떨렸다고. 아직도 플레이오프에서 호세에게 맞은 3점 홈런은 잊히지 않는다고 말이다. 임창용은 2001년~2003년 선발로 변신해 무려 44승을 챙기며 삼성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 삼성의 전무후무(前無後無) 통합 4연패의 마침표를 찍은 것 또한 임창용이었다. 삼성왕조 역사를 논하면서 절대 그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삼성 시절 임창용(출처 : 삼성라이온즈 & 인터넷 엔하위키)
삼성 시절 임창용(출처 : 삼성라이온즈 & 엔하위키)

 


Q) 임창용의 야구인생에서 1999년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시즌이다. 
A) 그해에 내가 51세이브 포인트를 했고, 진필중이 52세이브포인트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 거의 진필중의 두 배 가까이 던졌었다. 그해 마무리 투수였던 내가 138.2이닝을 던지고 방어율 1위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시즌이었던 것 같다. 

Q) 그해 롯데 자이언츠와의 플레이오프는 기억에 많이 남는다. 임창용 선수에게는 가슴 아픈 기억이겠지만 말이다. 
A) 나는 그때 플레이오프 당시 팔을 떨면서 던졌다. 불펜에 들어가서 앉아있으면 팔이 저절로 덜덜 떨리더라. 그런데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감독님께서 나만 찾으시니까. 지금 선수들 같으면 “저 못 던지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는 그때 감독님이 쉬라고 해도 던졌다. 그냥 던지는 것이 좋았던 시절이니까. 1이닝씩이라면 매일이라도 던질 수 있을 것 같았다.   

Q) 이미 지난 기사를 통해 당시 이승엽 선수와의 연봉 차이 때문에 서운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A) 그때 당시는 나도 자존심이 강할 때라 승엽이에게 가려지는 것에 솔직히 아쉬움이 있었다. 나는 맹세코 삼성에 와서 내 팔이 부서져라, 최선을 다했다. 또한, 성적도 뒤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삼성으로 트레이드되기 직전 나의 해태 시절 마지막 연봉이 5900만 원이었다. 그런데 나는 1998년 세이브왕 타이틀을 땄다. 그런데 당시 삼성 프런트에 계시던 분들은 “너는 우리 팀에서는 한 것 없지 않으냐. 보여줘라. 그러면 주겠다.”라고 말씀하시더라. 그래서 “내년에 봅시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8900만 원에 고분고분 사인했다. 속상했지만 내년에 잘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1999년 (이)승엽이가 홈런 신기록을 세웠다. 나도 최초로 50세이브 포인트를 돌파했고 방어율 타이틀을 획득했다. 구단에서 승엽이에게 1억1천만 원에서 3억 원으로 연봉을 인상해 줬다. 그런데 나는 2억 원을 준다고 하더라. 나는 그때 화가 나서 야구를 안 하겠다고 했다. 나도 50세이브포인트를 최초로 돌파했고 방어율왕 타이틀도 있는 데다 무엇보다 팀을 위해서 희생했으니 비슷하게라도 맞춰달라고 요구했다. 오래전 이야기지만 그런 아쉬움이 그때는 있었다.  

Q) 그러고 보니 이승엽 - 서승화 난투극 당시 임창용 선수가 앞장서서 싸웠던 것도 기억난다. 한국프로야구 역사에 남는 집단 난투 중 하나였다. 투수는 그런 상황에서 전면에 나서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A) 그때 싸우다가 내 옷이 다 찢어졌었다. 나는 앞으로 나가서 싸우고 싶은데 자꾸 뒤에서 누가 날 잡아당기더라. (웃음) 

Q) 아마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앞장서는 그런 면 때문에 후배들에게 인기가 많지 않았을까.  
A) 에이. 누구나 다 그렇게 하는 건데. 나는 그냥 후배들하고 만나면 밥 먹고 수다 떠는 것 이외에 크게 하는 것이 없다. 다들 혼자 사는 애들이라서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는 것을 좋아한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술을 전혀 못 마신다. 아마 내가 술을 좋아했으면 30대에 선수 생명이 끝났을 것이다. 한 잔만 마셔도 그 술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자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술을 먹으면 온몸이 빨개진다. 심지어는 눈알까지 빨개진다. 온몸이 빨개지면 너무 부끄럽다. 나는 강한데 괜히 약해 보이고 창피하기 때문이다.  

Q) 미국에서 돌아온 삼성 2기 시절(2014년) 류중일 감독님은 임창용 선수를 안 좋아도 많이 믿어주시더라. 결국, 임창용을 살려냈고 함께 2014년 삼성의 통합 4연패를 이룩했다.
A) 맞다. 그때 내가 좀 안 좋았는데 감독님이 나를 믿어주셨다. 류 감독님이 우직한 면이 있으시다. 나는 9회에 한해서만큼은 믿어주시면 무조건 해내야 한다는 나만의 책임감이 있다.  

 


3. 인대접합 수술로 인한 아찔했던 순간, 그리고 메이저리그 진출

거침없던 그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바로 인대접합수술을 받았던 2005년 당시였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실력만을 믿고 세상에 맞서 싸워왔던 선수다. 당시만 해도 인대가 끊어지면 수술성공률이 높지 않았던 시절이다. 그가 느꼈을 두려움도 당연히 컸을 터. 그러나 그는 타고난 신체능력으로 빠른 회복세를 보였고 일본에 진출해 ‘미스터 제로’라는 별칭을 얻으며 열도를 흥분에 빠뜨렸다. 또한, 5경기에 불과했지만 30대 후반의 나이에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밟는 성과를 일궈냈다. ‘천재’ 임창용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에 진출해 대성공을 거둔 미스터제로 임창용(출처 : 야쿠르트)

 

시카고 시절 임창용(출처 : 나무위키)
시카고 시절 임창용(출처 : 나무위키)

 


Q) 수없이 많은 순간이 있겠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언제인가. 
A) 일단 기억나는 것은 1999년 플레이오프에서 호세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은 것이다. 잘했던 것은 잘 기억에 안 남더라. 안 좋았던 것들이 기억에 남는다. 또 하나 꼽자면 팔꿈치 인대가 끊어졌을 때다. 29살 때 처음으로 수술이라는 것을 해봤다. 당시는 수술해서 성공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제 내 야구가 끝나는 건가’라는 생각을 당시 많이 했다. 그런데 정말 운이 좋게 재기를 했다. 힘든 시기를 잘 넘기니까 40살 넘어서도 던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Q) 메이저리그에 올라갔던 이야기도 좀 해 달라. 
A) 메이저리그에 5경기 정도 출전했었다. 그때 에이전트와 계약적인 부분만 잘 되었으면 그 이듬해도 메이저리그에서 던지고 있을 것이다. 당시 조건이 2가지였다. 그 해 콜업이 되면 다음 해는 메이저리그 초청선수로 시작하는 것. 콜업을 못 받으면 이듬해는 메이저리그에서 출발하는 계약조건이었다. 에이전트로서는 당장 보이는 돈이 중요하기 때문에 콜업을 주장했을 것 같은데 나는 돈이 그다지 급하지 않았다. 돈이 급했으면 미국에 올 이유가 없었다. 그때 계약을 잘해놨으면 다음 해에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되는 것이었는데 당장 돈이 급해서 에이전트가 장난을 친 것이었다. 

Q) 초청 캠프를 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국행을 선언했다.  
A)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은 이듬해 초청선수로 캠프에 가서 메이저리그의 냉정함을 몸으로 체험했다. 어린 선수들을 쓰지 굳이 ‘외국에서 온 나이 많은’ 선수를 안 쓰더라. 실력과 무관하게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청캠프를 가서 2경기인가 나가고 3번째 경기를 나가려고 하다가 못 나갔다. 그때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시카고 컵스 단장이 삼성에 바로 전화를 하더라. “우리가 임 선수한테 이만큼 썼으니까 그만큼 주고 데려가라”라는 것이었다. 원래는 삼성이 돈을 한 푼도 안 주고 나를 데리고 갈 수 있었다. 내가 나가야 자리가 나고 내 연봉도 아낄 수 있어서 무조건 나를 방출 시킬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기다리면 나를 방출시키는 것이었는데 당시 오승환의 공백으로 삼성도 사정이 급하다 보니 이적료 주고 데리고 가더라. 내가 한국에 빨리 올 수 있었던 이유다. 

 

 

4. “후배들아~ 누구를 따라 하지 말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라”  

임창용은 선진야구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사람이다. 지금의 역동적인 투구 폼을 혼자 만들어낸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지독히도 말을 안 들었던 사람이었다. 코치들이 자신의 폼을 그대로 전수하려는 문화를 스스로 거부했다. 그는 프로라면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코치가 시키는 것을 생각 없이 따라 했다가 결과가 안 좋다고 코치 탓을 하는 선수는  프로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소견이다. 프로라면 누구를 따라 하기보다 ‘누가 봐도 저 선수다’는 확실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고 그는 후배들에게 조언한다. 

 

 

"누구를 따라하기 보다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라" (출처 : KIA타이거즈)

 

 

Q) 임창용의 폼을 따라 하는 어린 선수들이 많다. 현재 고교야구에서도 사이드암, 언더핸드 하면 전부 임창용이 동경 대상이다. 그런데 임창용 선수의 폼은 함부로 따라 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A) 따라 할 거면 몸이 유연한 어릴 때 빨리 따라 해야 한다. 나이 먹고 몸 굳었을 때 따라 하면 다친다. 옛날에 삼성 후배 권오준도 내 폼을 따라 하다가 다쳤었다. 

Q) 사실 임창용을 동경하는 수없이 많은 후배에게 조언 한마디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의례적인 내용 말고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부탁한다. 
A) 요즘은 스마트 세대 아닌가. 부디 후배들은 나 같은 구설에 휘말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야구 쪽으로 조언 하자면 확고한 자기 스타일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누구와 비슷하다가 아니라 내 이름 석 자를 알릴 수 있는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 폼만 봐도 누구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역동적인 투구폼을 자랑했던 임창용(출처 : KIA타이거즈)

 

 

Q) 하지만 투수의 폼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정석적인 규칙이 있는 것 아닌가. 예를 들면 스트라이드 보폭은 6발 반, 팔 스윙은 부드러운 상하회전, 왼발이 오픈되지 않고 타자를 향하고 있는 형태 등 한국은 유망주들에게 어느 정도 정형화된 폼을 강요하는 경향이 짙다. 
A) 내가 만약 지도자를 하게 된다면 그렇게는 안 가르친다. 기자님과 내가 체형이 다르듯 다른 선수들 개개인은 유연성이 틀리고 골격이 틀리다. 아무리 똑같이 하려고 노력해도 절대 똑같이 안 된다. 고유의 신체조건이 있어서 절대 똑같은 폼이 나올 수가 없다. 그래서 자기만의 폼을 찾으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왼발이 굉장히 많이 오픈되는 스타일이다. 거기에 무릎은 타자를 향해있는 독특한 폼이다. 내가 이런 폼으로 잘 던진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일부 옛날 코치님들은 자꾸 자신의 폼을 요즘 선수들에게 ‘전수’를 하려고 한다. 나는 그 점을 이해할 수 없다. 자신과 타인이 다른데 왜 선수들을 자꾸 본인과 똑같이 만들려고 하는 것인지. 

나는 원체 말을 안 듣는 성격이라 그런 것을 안 받아들였다. 코치님이 보고 있을 때는 코치님이 하라는 대로 하다가 코치님이 가고 나면 내가 던지고 싶은 대로 던졌다. 자기가 좋은 스타일로 던지고 자기가 직접 경기로, 몸으로 확인하는 것이 최고의 연습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의 폼을 강요해서 “내가 이렇게 누구를 만들었어.”라고 말한다면 그 코치도 문제가 있고 “누가 이렇게 시켜서 따라 하다가 망했어.” 라고 핑계를 대는 선수가 있다면 그 선수도 문제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Q) 임창용 선수의 말을 들어보면 좋은 투수코치가 충분히 되고도 남을 것 같다. 
A) 나는 내가 잘 안다. 나는 코치라는 직업과는 안 맞는다. 남을 가르치는 것을 잘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코치를 하면 감독과 분명 마찰이 생긴다. 그래서 나는 코치를 하면 안 된다. 내가 코치를 하려면 외국에서 해야 한다. 나에게 투수에 관한 전권을 주지 않는 이상 못한다. 우리나라 실정상 나를 안고 갈 수 있는 사람이 없다. 혹시 김성근 감독님이라면 또 모를까. 솔직히 아직 나의 미래는 정리가 전혀 안 되어 있다. 천천히 푹 쉬면서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 생각해보려고 하고 있다. 

 

 

5. 떠나는 임창용이 팬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편지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시작한 지 2시간이 훌쩍 넘어가는 밤늦은 시간. 항상 당당하게 질문에 답하던 그가 갑자기 나지막한 목소리로 “죄송하다”는 말을 꺼냈다. 용기 내어 어렵사리 꺼낸 그의 진심이다. 그는 굉장히 내성적인 성격이다. 말투도 조곤조곤하고 어색함을 많이 타서 질문을 받기 전에는 먼저 입을 떼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런 그가 힘겹게 스스로 꺼낸 한 마디라 그 울림의 폭이 달랐다. 어쩌면 임창용은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 그리고 기자는 이 한마디를 듣기 위해 그렇게 길고 긴 시간을 돌고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임창용이 전하는 진심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Q) 요즘 두 아들이 아버지에 관해서 물어보지는 않는지 궁금하다.  
A) 아들들이 “아빠, 요즘 왜 야구 안 해?” 라고 물어보기는 하더라.  

Q) 정말 은퇴식이 필요 없나. 기자는 아직도 그것이 무척 아쉽다.  
A) 은퇴식은 나의 두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내 아들들에게 ‘아빠가 이런 사람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은퇴식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지, 나 혼자라면 은퇴식은 필요 없다. 선수들이 은퇴식 하는 것을 많이 봤다. 다른 선수들이 은퇴하는 것만 봐도 울컥한다. 내 은퇴식을 하면 나도 분명히 울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떠나기 싫더라. 내 이미지 그대로 강하고 깨끗하게 야구만 하다가 떠나고 싶었다. 

Q) 다시 대화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선수를 최종적으로 포기하실 때 어떤 심정이셨는지 솔직히 이야기해줄 수 있나.  
A)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딱 1년이었다. 딱 1년만 더했으면 모든 최고령 타이틀도 다 바꾸지 않았을까. 미련을 두지 않기 위해 현재 운동을 전혀 안 하고 있다. 지금부터 몸 좀 만들어서 일본에서 제대로 한번 던져볼까?. 
 
Q) 오늘 이렇게 긴 시간 임창용 선수와 이야기를 나눠보니 언론에서 접하는 임창용과 많이 다른 것 같다. 
A) 나는 마운드에서 기가 강하다. 그리고 투구하는 모습도 좀 사납다. 그렇다 보니 이미지가 좀 사납게 보일 수가 있는데 내 지인들은 전혀 그렇게 안 본다. 사실 언론과 소통하고 나의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것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이기는 한데 나는 굳이 나를 그렇게 포장하고 싶지는 않다. 성격 자체가 가식적이지 못해서 그런 것을 잘하지 못한다.   

 

 

임창용이 팬들에게 전하는 진심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출처 : KIA타이거즈)
"운동장에서 만큼은 최선을 다했던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  (출처 : KIA타이거즈)

 

 

Q) 24년 동안 야구 선수생활을 하면서 후회되는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   
A) 나는 팬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많은 구설에 올랐던 선수였다. 사생활에서 부끄러운 것이 많다. 순간순간 한 번씩만 생각했다면 그 많은 실수를 안 했을 것 같은데 단순했던 것 같다. 나는 그냥 나를 위해서 앞만 보고 살았던 것 같다. 평생 운동만 해와서 해도 되는 것과 잘못된 것의 경계를 구별하지 못했다. 거기다, 워낙 낮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 표현도 잘 못 하다 보니 더더욱 팬들에게 심려를 끼쳐드렸다. 죄송하다.  

Q) 임창용 선수가 본 기자 앞에 앉아 있는 이유는 팬들에게 전하고 싶은 진심이 있기 때문 아닌가. 마지막으로 진심을 담아 팬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 달라. 
A) 나는 이제 은퇴를 했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팬 여러분들이 임창용이라는 야구 선수를 기억해주실 때 마운드 위에서는 그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고 항상 최선을 다했었던 선수로 기억해주시면 감사드리겠다. 이제 ‘투수’ 임창용도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좋은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도록 응원해주셨으면 좋겠다. 다시 한 번  임창용이라는 선수에게 보내주셨던 팬 여러분들의 성원과 사랑에 깊이 감사드린다. 

 


한국스포츠통신 전상일 기자(nintend99@naver.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4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문성환 2019-05-29 12:55:24
기사 감사합니다.
창용 선수. 던지는거 보고 싶네요 .딱 6개월만이라도요. 일본 소뱅에 영감님 계시자나요..소뱅에 입단테스트 받고. 실력으로 다시한번 건재함. 보여주세요

수리 2019-05-28 15:20:09
전상일기자님 좋은기사 써주셔서 감사해요...

공구 2019-05-28 08:05:55
저도 보고싶어여

평강 2019-05-28 01:36:53
임창용 선수 보고싶어요... 앞으로 꽃길만 걷길..
그래도 은퇴식은 보고싶은데 기아랑 삼성 경기일때 합동 은퇴식 어려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