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철 지휘자는 우리나라 합창 음악의 산증인이라고 할 정도로 대한민국 합창 음악에 큰 공헌을 하였다. 국립합창단 창단, 부천시립합창단 초대지휘자 및 부천시립예술단 총감독 역임 등 한국 합창 음악을 위해 평생을 몸 바쳤다. 그리고 가톨릭대학교에서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합창 분야에서는 고전 합창 음악이 가진 힘과 예술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 해왔다. 그리고 가톨릭 음악을 위해 평생 작곡과 편곡, 지휘를 해 가톨릭 성음악의 대부로 불린다.
팔순이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한국오라토리오싱어즈(이하 한오싱)의 예술감독, 상임지휘자로 정정함을 과시하고 있는 최병철 지휘자는 오는 10월 4일 롯데 콘서트홀에서 한오싱의 창단 30주년 기념 제 34회 정기연주회를 준비하고 있다.
연주회의 레퍼토리는 항상 고전 위주의 곡들을 선곡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 연주회에서는 모차르트의 C단조 미사와 최병철 작곡의 칸타타 코리아 등을 선보일 예정이다. 연주회 전체의 레퍼토리는 최병철 지휘자의 철학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만난 최병철 지휘자의 모습은 팔십대 중반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연습 중에도 직접 노래를 하면서 가르치고 단원들이 집중하지 않을 때 불같은 호통을 치기로도 유명하다. 오랜 세월동안 식지 않는 열정에 감탄스러웠고 30년간 지휘봉을 잡고 있는 한오싱에 대해 궁금해졌다.
1.한국오라토리오싱어즈, '30년을 함께 해온 최병철 합창 음악의 동반자'
▼ 한오싱의 역사가 30년이나 되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창단하게 된 배경을 알고 싶다.
한오싱은 1988년에 창단되었다. 88년 올림픽이 개최 될 당시, 문화 올림픽이 같이 개최되었고, 음악 이벤트에 큰 비중을 두었다. 그중 전 세계가 화합하는 의미로 60여 개국의 합창단을 초청하여 페스티발을 하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국립합창단과 서울시립합창단만 있었고 실력도 뛰어나지 않아 열악한 환경에 있었다. 그래서 실력 있는 합창단을 구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당시 명동성당의 가톨릭 합창단이 명성이 대단했다. 당시 KBS교향악단은 합창이 필요한 경우 명동성당의 가톨릭합창단과 함께 했을 정도였다. 가톨릭 합창단을 페스티발에 참가시키자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국가 행사인 올림픽에 가톨릭합창단을 국가대표로 참여시키는 것은 사회, 종교적 문제가 야기될 수 있는 사항이었다. 그래서 가톨릭합창단의 멤버들을 주축으로 ‘오라토리오서울’이라는 단체를 창단하였고 ‘한국오라토리오싱어즈’라는 이름으로 현재 활동하고 있다.
▼ 이제 창단 30주년, 제 34회 정기연주회를 하게 되었다.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다.
창단 이후 매년 세 번 정도의 연주회를 이어하고 있다. 기쁨도 있었지만 아픔도 있었다. IMF 당시 우리 단체를 후원하던 분들의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운영에 어려움이 있었다. 나의 수익으로 끌고 오기도 했지만 명예퇴직을 한 이후에는 그마저도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이 단체를 지켜왔고 이번 연주는 30주년 연주로 의미가 뜻 깊다. 기쁜 것은 우리나라 문화 후원이 발전하여 메세나 협회 등 우리 단체를 후원해주는 단체들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성대한 연주회를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유명 성악가들을 초청하는 것이 아닌 우리 단체 내의 솔리스트들을 적극 기용하여 연주회의 솔로 파트를 맡기고 있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 연주회를 구성하는 선곡의 기준이 있으신지 궁금하다.
나는 유럽 정통 클래식 레퍼토리를 추구한다. 특히 르네상스부터 후기 낭만주의의 레퍼토리 중 대표적인 작품들을 연주해왔다. 우리 단체의 팬들도 클래식 음악 마니아들이 오는 편이다.
최병철 지휘자는 작곡과 합창, 두 분야 모두 큰 업적을 남겼다. 작곡가로서는 유럽 고전 음악의 작곡기법과 우리나라 민요를 혼합하여 한국적인 느낌이 강한 클래식 곡들을 작곡했다. 합창 분야에서는 유럽, 미국, 아시아 등 전 세계를 누비며 우리나라 합창의 우수성을 알린 장본인이다. 그의 음악 인생이 궁금해졌다.
2. 지휘자 최병철과 작곡가 최병철
▼ 작곡과 지휘를 빼고는 선생님을 설명할 수 없다.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내가 어렸을 때 6.25 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보성고등학교를 다녔고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6.25 이후 우리 집안의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기 때문에 나는 길거리에서 담배장사, 구두 닦기를 해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전문적인 음악교육은 꿈도 꾸지 못했다.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화성학’이라는 책 때문이다. 당시 엿장수에게 담뱃갑을 만들 신문지나 낡은 책을 샀는데, 어느 날 ‘화성학’이라는 책을 보았다. 책의 내용이 흥미로워 엿장수에게 그 책을 산 후 열독 했고 책상에 피아노 건반을 그려서 상상으로 피아노를 치면서 공부했다. 어렵게 공부한 결과 서울대학교 작곡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지휘자 인생은 혜화동 성당에서 지휘를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다리가 불편해서 우리 집 근처에서 걷기 운동을 항상 했었다. 토요일 저녁이 되면 혜화동 성당에서 아름다운 합창 소리가 들려왔었고, 합창 소리에 홀려 성당 안으로 들어가 합창만 듣고 집에 가기를 몇 주 반복했다. 그랬더니 신부님께서 들어와서 같이 불러보자고 제안하셨고 그 이후 성가단원이 되어 활동하다가 지휘자가 되었다.
본격적으로 작곡과 지휘 활동을 시작한 것은 대학교 졸업 이후 이다.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제물포고등학교 음악교사로 발령을 받았었다. 1년 근무 후 모교인 보성고등학교 음악교사로 초청을 받았고 이듬해인 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군사정변 이후 군 미필자들은 모두 직장에서 추방당했는데 나 또한 지병으로 인해 군 미필자였음으로 추방당했다. 직장에서 추방당한 후 작곡에만 전념하게 되었는데, 당시 제 1회 동아콩쿨에서 작곡부문 1등을 하게 되었다.
이후 성심여자고등학교에서 나를 지휘자로 초청하였다. 학교의 크리스마스 음악회에서 합창단을 지휘하게 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교편을 다시 잡게 되었다. 성심여고의 교사로 활동하던 중 춘천에 개교할 성심여대의 교수자리를 제안 받게 되었다. 당시 나는 교수가 될 준비가 안 되었다고 생각하여 손사래를 쳤지만 학교 측의 삼고초려로 끝내 성심여대 음악과를 만들고 교수가 되었다. 그때부터 작곡가, 합창지휘자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 많은 연주 활동을 하셨지만 그중 도쿄 오라토리오 소사이어티와 했던 연주회는 아직도 회자 되고 있다.
나는 도쿄 오라토리오 소사이어티와 88 서울 올림픽 합창 페스티발을 계기로 관계를 맺었다. 군지 히로시라는 도쿄 오라토리오 소사이어티 예술 감독은 일본 합창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었고, 단체 또한 일본 내 최고의 오라토리오 합창단으로 자부심이 대단했다. 하지만 전 세계 합창단들과 한 무대에서 리허설을 해본 그들은 실력이 미천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최고의 무대를 올릴 방법을 모색하던 그들은 나에게 지휘를 부탁했다. 정중하게 부탁했기 때문에 그들의 부탁을 무시할 수 없었고 나는 부천시립합창단원들과 함께 그들의 연주에 참여하여 지휘를 하였다. 문화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그들이 우리의 합창 테크닉에 감탄한 사건이었다.
이후 도쿄 오라토리오 소사이어티는 나와 우리 단체를 일본으로 초청했다. 단체로는 6번 정도 참여했고 나는 객원지휘자로서 십회 이상 일본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도쿄 오라토리오 소사이어티는 1년에 한번 일본 각지의 오라토리오 소사이어티 멤버들이 모여 도쿄문화예술회관에서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불렀다. 천명이나 되는 인원들이 부르는 만큼 큰 무대였다. 우리는 하이든의 넬슨 미사(Nelson-Messe d moll)를 연주했다. 첫 곡 Kyrie의 시작과 동시에 그들은 우리를 인정하였고 극진히 대접해주었다. 이후에도 교류를 많이 하였지만 후쿠시마 방사능 유출 사건 이후로 우리가 일본에 가지 못하면서 교류가 끊어졌다.
3. 합창에 대한 음악가 최병철의 생각
▼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끊임없이 클래식을 강조하시는 것 같다. 합창 음악에 대한 어떤 소신이 있으신가.
우리나라가 전반적으로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것처럼 합창도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온 지휘자들에 의해 우리의 합창 문화가 자리 잡은 것 같다. 예를 들어 국립합창단은 예전부터 ‘로저 와그너 합창단(미국의 유명 합창단)’의 합창을 모토로 활동해 왔다.
물론 현대 합창의 기법으로 미국식 합창이 환영받는 것은 옳은 일이다. 하지만 나는 클래식, 특히 유럽 고전 음악의 힘과 아름다움 그리고 방식은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류 합창은 클래식 합창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국립합창단을 기점으로 합창 스타일이 달라지고 있는 것 같다. 국립합창단은 모차르트의 ‘C단조 미사’를 연주할 정도로 스타일이 많이 변했고 다른 합창단들도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다.
특히 고전곡을 많이 하는 것은 공부하는 후학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게 된다. 일장일단이 있지만 고전 레퍼토리의 전통을 고수해야한다는 생각은 확실히 가지고 있다. 나의 작품도 전통적인 기법에 우리나라 민속 가락을 접목시켜서 작곡한 곡들이 많다.
요즘은 랩을 배우기 위해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온다. 물론 랩, 힙합 문화는 우리나라 본토 문화가 아니지만 우리의 언어로 재해석하여 다시 세계화 시켰다. 영국의 한 문화평론가가 쓴 글에 공감을 한 적이 있다. ‘한 민족의 우수성을 보기 위해서는 그 민족의 음악을 들으면 된다.’라는 글이었는데 그만큼 음악은 그 민족의 아이덴티티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아이돌을 비롯한 많은 가수, 음악가들이 우리나라를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 세계적인 추세를 따르되 우리만의 문화를 더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앞으로도 이러한 시도는 계속 되어야 할 것이다.
▼ 소신이 확실하신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기간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지휘자로 남아계신다. 마지막으로 후학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클래식 음악은 계속 하향세임에 틀림없다. 하향세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 것이 클래식이다. 고전은 우리의 삶 깊숙이 뿌리 박혀 있고 그 속에서 배울 점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클래식 시장이 하향세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 클래식 음악을 꾸준히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한다. 그것은 ‘인정’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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